2010년 5월 29일 토요일

팬티와 빤스

손현숙 시인의 재미난 시 하나를 읽었다. 제목은 <팬티와 빤스>.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샅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빤쓰'는 영어 pants가 일본어를 거쳐서 한국어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영어의 pants는 원래 속옷이 아니라 겉에 입는 바지다. '팬티'는 영어의 panties에서 온 말로 여성의 속옷 하의를 가리킨다. 영어에서 남자 속옷 하의는 일반적 용어로 underwear, 구체적으로는 shorts 혹은 boxer shorts이다. 하지만 '팬티'는 콩글리쉬가 되어 남녀 공용으로 사용된다. 외래어가 이식되면서 그 의미가 변형되는 예를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엔 '빤쓰'를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제는 '팬티'가 압도적이다. 일본어 정화 운동에 의한 것인지, 영어의 힘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영어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최근 몇 십년 간 '팬티'가 '빤쓰'를 밀어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여기서 '빤츠'와 '팬티'가 갖는 connotation(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함축적 의미)은 확연하다. 후즐근하고, 아줌마가 입을 것같은 빤쓰와 신델렐라 공주가 입을 것 같은 화려한 팬티. 인간은 '빤쓰'와 '팬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심리적 양면성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그냥 그대로 자기이고 싶으면서도 남을 의식해 또 다른 나를 보이고 싶은 마음, 후자인 경우엔 당연히 좀 더 화려하고, 세련되고, 멋있고, 아름다운 나가 될 테다. 아마도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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