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4일 금요일

시 한편

정호승 시인의 시 "휴대폰의 죽음"의 전문을 실어 본다.

휴대폰의 죽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영등포구청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전동차가 역 구내로 막 들어오는 순간
휴대폰 하나가 갑자기 선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전동차를 기다리며 바로 내 앞에서
젊은 여자와 통화하던 바로 그 휴대폰이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전동차는 급정거했으나 그대로 휴대폰 위로 달려나갔다
한동안 전동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역무원들이 황급히 달려오고
휴대폰의 시체는 들것에 실려나갔다
한없이 비루해지면 누구의 얼굴이 보이는 것일까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지 못한 것일까
선로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전동차는 다시 승객들을 태우고 비틀비틀 떠나갔다
다시 전원의 붉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휴대폰은 자살한 이들과 함께
천국의 저녁식탁 위에 놓여 있다

절망과 죽음 끝에 도착한 천국의 저녁식탁이 그나마 위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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