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6일 목요일

시 한편

시인이면서 문학비평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장석주 시인의 시 <돌과 박새> 전문을 인용해본다.

아궁이 잿속 불구덩에 묻은 감자만 하랴. 네 속은 내가 안다, 참 시커멓게도 탔구나. 난 쓸데없이 많은 책을 읽었어. 덧없는 것들과 관계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산비알같은 명예를 잃었어. 사랑하는 것들은 참 멀리 있구나. 무슨 염치로 당신의 이쁜 엉덩이를 보겠어. 가슴에 벙어리 종달새 암수 한 쌍, 첫 수확한 토종꿀같이 오는 황혼, 하늘에 진흙으로 구운 구름들, 거리엔 남의 애를 밴 여자들이 걷는다. 난 무분별과 어리석음으로 청춘을 낭비했어. 박새들아, 내 빚을 탕감해 줘. 굳고 정한 여자와의 약속도 못 지켰으니, 때늦은 후회로 자주 정수리는 과열되고 무릎 몇 깨쯤 잃어버려도 좋아. 헌 가슴팍에 둥지를 틀다가 소스라쳐 날아가는 가을 박새들아, 잘못 했어, 잘못 했어. 돌아, 센 불에 졸아든 한약 같은 네 입김을 내 귓바퀴에 한 번만 부어줄래? 돌아, 검붉은 피라도 솟구치게 내 머릴 한 번 찍어줄래?

'산비알'은 '산비탈'의 충청도 방언이라고 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다. '산비탈 같은 명예'라...

쓸데없이 많은 책을 읽고, 덧없는 것들과 관계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은 참 멀리 있고...

언젠가 책과 관련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엮어낸 책에서 장석주 씨가 머무는 시골집, 그의 서재에서 책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았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책과 벗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고립된 삶을 자처한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에선 책 속에 묻혀, 정신세계를 갈구하며 사는 삶이 포기해야 할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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