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190)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행복론에 관한 책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가끔 행복한 순간에 삶의 충일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의 행복을 음미하는 것과 행복을 목적으로 삼아 그것을 좇아 가는 건 다른 얘기다.
재일 교포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뒤집어 버린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결과일 뿐이라고. 삶이 던지는 물음에 응답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생의 물음에 방점을 찍는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과 슬픔, 지진과 쓰나미, 원전의 파괴로 인한 수 많은 죽음과 황폐화를 목격하면서 우리의 삶이 '비상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위기를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썼고, 그것이 바로 그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고민하는 힘. 속편>이라고 한다. 2008년에 번역 출간된 <고민하는 힘>의 속편으로 나온 책인데 한국어 제목으론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일본어 판에 없는 한국어 서문에서 저자가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쓴 걸 보고 출판사에서 제목을 <살아야 하는 이유>로 달았다고 한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 근대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오스트리아의 정신신경과 의사이자 유대인으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프랑클의 고민과 사유를 통해 21세기 현대의 삶을 조명한다. 근대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문제인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고, 이를 분석하고 가시화 하면서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아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도'이다. 저자는 인간의 가치가 '창조', '경험', 그리고 '태도'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태도'야 말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태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프랑클이 든 예를 인용한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176)
'태도'는 죽기 바로 전에도 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의 양식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는, 그래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쉽지 않지만 '거듭나기'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쩌면 행복한 삶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진리와 방법
20세기 서구 지성사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을 15년 동안 다섯 명의 번역자가 작업하여 이제 번역본을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에 1부가 이미 나왔고 이제 12년이 흐르고 2권이 나온 것이다. 1부는 이번에 개정판으로 보완되어 다시 나왔다고 한다.
가다머는 하이데거(1889-1976)의 제자로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자 '철학적 해석학'(philosophische Hermeneutik)의 창시자로 꼽힌다. 12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60살이 되어 펴낸 <진리와 방법>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천착한다. 그는 플라톤에서 시작해 딜타이에 이르는 서구 근대 학문의 역사와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그의 비판과 성찰은 철학뿐 아니라 미학, 문학, 역사학, 신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다머에게 진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인간 경험의 역사성으로부터 나오는 이해의 산물이다. 때문에 가다머의 해석학은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그는 역사적 문헌, 사건과 현재의 해석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지점에 주목했고, 이를 '영향사'라고 일컬었다. 역사적 전통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선입견이 이해의 기초적인 조건이 되지만, 현재의 해석자 스스로도 역사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펼쳐지는 부단한 상호작용이 이해를 확장해간다고 본 것이다. 전통의 전승과 전통과 현재의 소통을 매개하는 '언어'는 가다머에게 특히 중요한 탐구 대상이었다."
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이 책의 일부를 원서로 읽은 기억이 있다. 문학에서도 필독서로 추천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점이 결여된 상태에서 이해가 쉽지 않았었다. 숲에 들어가 나무만 바라보고 숲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책을 다시 훑어라도 보고 싶다. 그때 내가 무엇을 이해했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면서.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걷기 예찬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초대되어 한국을 방문한 그의 나이는 두 달 후면 75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걷기'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역시 걷기를 좋아하고 제주 올레길도 이미 2코스 걸었다. 시간만 허락하면 동네길 걷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울 도심 걷기, 산길 걷기, 그리고 언젠가는 한비야 씨처럼 한국의 곳곳을 한바퀴 걸어 보고 싶은 희망도 갖고 있다.
올리비에 씨가 처음 걷기를 시작한 건 은퇴 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서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있던 그는 걷기를 시작했다. 산티에고를 걷고, 실크로드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걷고 있다. 다음 계획은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6개월을 걸을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감동적인 것은 그가 '쇠이유(Seuil 문턱)'라는 협회를 만들어 비행소년들의 재활을 돕는다는 사실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온 아이들을 데리고 3개월 동안 2000km를 걷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3개월 동안 2000km를 걷는다. 하루에 보통 25km 정도 걷는다. 두 달 정도는 몹시 추운 날씨이거나 눈 속에서 걷는다. 첫 달 몇 주는 등이 아프거나 발이 아프다며 저항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걷기에 즐거움을 느낀다. 끝까지 걷고 나면 아이들은 늘 숙이고 다니던 고개를 똑바로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 해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기 존엄성을 회복한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도 그들이 문턱을 넘는 데 힘을 실어 준다."
이 말을 들으며 마음이 찡해졌다. 공부에 치여, 성적에 밀려 자존감이 없는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이 머리를 스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긴 걷기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걷기를 통해 마음과 몸이 치유되고, 온전히 자기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걷기를 통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올리비에 씨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한국 고전 번역
최교수는 현재 <태조실록>을 번역 중이라고 한다.(조선일보 11월 3-4일자) 그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세계에 소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1차적으로 <태조실록>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자(漢字)를 하나 하나 영역하는 경우 곡괭이로 땅속 깊이 박힌 나무뿌리를 캐는 것 같고, 한 줄 전체를 번역하면 소로 밭 한 이랑을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요. 번역이 완성되면 어떤 씨앗을 심어도 삭을 틔울 것 같은 옥토로 변하니, 이 기쁨을 무엇에 견줄 수 있겠어요?"
최교수는 번역의 지난한 과정과 그 결과로서 얻게되는 기쁨을 밭을 가는 농부의 작업에 비유한다. 한영번역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충분히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고전 번역은 그 어려움이 몇 배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교수는 사실 영문학자이다. 하지만 시인이기도 한 그는 한국문학에서부터 출발했고 영문학을 공부한 후 이제 한국의 문화를 영문으로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고전을 번역할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외국어 교육의 허점을 꼬집는다.
"학자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학문을 해야 합니다. 영문학자라고 해서 서양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벌집 구멍 속'에 갇혀서 학문하거나 전문가연해서는 안 됩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고 그 뿌리 없음과 공허함에 회의적이 되어 다른 길을 밟아온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다. 애초부터 학문하는 목적을 설정하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목적'을 안다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이끌어주는 '깨인' 멘토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하지만 그래도 공부해서 버릴 건 없었던 것 같다.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 역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올해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고전은 우리 한국인이 먼저 읽어내야 할 과제다. 적어도 나에게 이 과제는 즐거운 숙제이기도 하다.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묵경
전국시대 사상가 중 한 명인 묵자의 사상을 담은 책 <묵자>는 모두 5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중 '경' 상,하와 '경설' 상,하, '대취', '소취' 6편을 가리키는 <묵경>을 한국의 한 연구자가 '주해'를 해서 내놓았다.(한겨레 2012.10.3)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염정삼 연구교수가 묵자의 사상을 주해 작업을 통해 1,2권으로 풀어냈다. 이 기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건 고전을 연구 소개하는 방법이 세 가지라는 사실이다.
텍스트가 이어져온 과정을 파고드는 '주해', 텍스트의 내용을 풀이하는 데 더 큰 목적을 두는 '번역 해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는 데 텍스트를 활용하는 '재해석'이 그것이다.
묵가 사상은 유가 사상이 중국 문명의 중심축이 되면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청대 고증학의 발달로 다시 조명을 받았다. 청대 학자 필원이 송대 판본을 계승한 '도장본'을 저본으로 삼아 그동안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던 <묵경>의 순서를 바로 잡았고 이 작업을 통해 '정본'이라 할 만한 <묵경>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뒤 이어 청대 말기의 학자 손이양은 <묵자간고>를 통해 이전까지 <묵경>과 관련해 이뤄진 모든 논의와 연구를 망라했다고 한다.
염 교수는 손이양의 작업을 참고했다고 하는데 그의 주해 작업은 우리 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도라고 한다. 고전의 다양한 판본을 수집해 비교하고 여러 판본들의 계열과 관계망을 파악하는 '텍스트 크리틱'(비평)이 1차적이고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한다. 2차적으로는 텍스트가 시대별, 연구자별로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식이다.
1920년대에 후스(호적), 량치차오(양계초), 등의 학자가 <묵경>에 천착했고, <묵경>은 논리를 바탕에 두고 언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중국 고대의 과학적 전통을 재조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한다.
다음달 모임에서 <묵자>를 다루게 되는데 신영복 선생의 '재해석'적 방법이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물론 <묵경> 원전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인식의 한계가 있겠다. 그래서 고전의 길은 길고도 멀다.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책은 도끼다
박웅현은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각인될 이름이다. 자신의 책 제목 대로 이 책은 내게 그야말로 '도끼'였다.
청중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독회'를 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카피 라이터인 그가 창의력의 원천은 바로 책이라고, 그 중에서도 인문학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독법을 소개한다.
모두 8강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그는 이철수, 김훈, 알랭 드 보통, 고은, 지중해 문학(여기엔 김화영, 까뮈, 니코스 카잔차키스, 릴케가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 그리고 법정 스님 등,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읽고 있는 책, 읽었던 책 등을 불러 낸다. 그의 독법은 정말 도끼로 머리를 치듯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날 흡입했다. 마치 '영혼의 친구'를 만난듯 했고,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가 자신이 읽은 책을 통해 체험한 삶의 풍요로움이 그대로 내게 전염되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그가 말하는 삶의 지향점, 풍성한 삶을 사는 방법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했다.
밤 늦게까지 불을 켜고 읽다가 오늘 아침 일어나서 다시 손에 넣어 정오가 다 되어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는 다독 콤플렉스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일상을 영원한 순간으로 체험하게 하고, 다양한 바람의 색깔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책들을 읽고, 천천히 여러번 읽으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라고 한다.
그는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끝에서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나이가 된 것이다. 같은 연배의 나에게 그의 생각은 마치 내 생각인양 친근하다. 이렇게 책은 도끼가 되기도 하지만 든든한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카프카의 말을 제목 속에 인용하는 그녀의 책은 내게 몇 번의 전율과 가슴뭉클함을 전달하면서 내 삶을 깨어나게 했다.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도끼처럼 내 삶을 깨우는 그녀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미 그녀의 시를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시집을 산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의 시를 접하게 되었는지 그 경로는 알 수 없지만 몇 편의 시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다.
이 책에는 그녀의 삶의 편린들이 모여 있다. 고독과 자유를 추구하며 세상을 떠도는 시인은 기억과 일상의 성찰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문학과 시가 그녀 삶의 전부이길 바라는 그녀는 스스로 원한 '왕따'의 삶을 살지만 그 삶을 간접 체험하는 독자는 그 삶이 부럽다. 위로가 되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다양한 결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독자의 눈을 더욱 맑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책장 한 켠에 꽂아 두고 시집처럼 꺼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2012년 9월 10일 월요일
대책없이 해피엔딩
씨네21에 두 친구(초등6부터 친구였다니 참 오랜 친구)가 돌아가며 대꾸하며 영화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2010년에 책으로 냈다. 워낙 김연수 팬이기도 하고, 김중혁은 예감에 재미난 작가일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다가 이렇게 두 사람을 한번에 낚았다. 김중혁의 유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미소도 짓고, 소리내어 웃기도 하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영화를 참 등지고 살았구나, 반성을 하기도 했다. 사실 반성할 일은 아니다. 살다보면 상황이 그러저러해서 영화를 멀리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젊은 시절 유학기간 동안 한때 열심히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영화 소개글을 영화잡지에 써서 보내기도 했었다. 베를린과 뮌휀 영화제에서 하루동안 몇 편의 영화를 줄기차게 보면서도 전혀 피곤해 하지도 머리가 무거워지지도 않았었다. 커다란 화면에서 <피아노>를 보며 전율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렇게 한동안 영화에 몰입했지만 (사실 내가 자발적으로 하게 된 건 아니었고 어쩌다 일을 맡아서) 언젠가부터 영화는 내 삶에서 멀어졌다. 결혼하고 애들 키우고 생활에 뿌리를 내리기위해 아둥바둥하는 동안 도대체가 문화생활을 향유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든 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버린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모든 건 때가 있듯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또 다시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겠지 희망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희망해도 되는 걸까.
2012년 9월 9일 일요일
나, 김점선
김점선의 그림은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고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박완서 선생 등과 친한 사이였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그림이 주는 천진성과 장식적인 느낌 때문에 진지하게 그녀의 예술을 평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서야, 그녀가 죽고 3주기가 되고 나서야 그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빈 자리를 아쉬어 하면서...
<10cm 예술>을 소장하고 싶어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니 이미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책들은 다행이도 출판된 게 많았다. 그 중 <나, 김점선>은 깊은샘에서 1998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온 후 2007년에 2쇄를 찍었다.
책의 서두에 소설가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최윤은 김점선을 '점선을 닮은 사람'이라고 칭한다. "나타난 것과 숨은 것의 비율이 일정한 점선", "본질에 직접 당도할 줄 아는" 점선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쓴 글들을 읽으며 (이 책은 그녀의 어린시절의 기억에서부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겪은 일상의 면면을 그려내고 있다), 그녀가 참으로 직설적으로, 담백하게, 본질에 다다르며 생을 살았다는 걸 느낀다.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자 했고, 도발적으로 결혼한 한 남자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지혜롭고 따뜻한 엄마의 마음을 지녔던 그녀. 독창적인 그녀의 사고는 모든 관습과 허위를 깨부수며 자신의 길을 걸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넉넉한 사랑으로 세계를 자신 속에 품었었다.
그녀는 어떤 일에 한 번 몰두하면 뭔가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사람들이 무궁화꽃이 촌스럽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왜 그런 꽃이 우리나라의 국화가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꽃을 관찰한다. 마당에 무궁화 꽃을 심고 물을 주면서 관찰한다. 꽃이 벌레에 먹혀 줄기와 가지만 남긴 채 꽂꽂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걸 보고 계속 물을 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궁화가 다시 활짝 꽃을 피운 걸 보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그녀. "싱싱하고 건강한 아름다움, 숨겨진 듯한, 얼핏 눈에 띄지 않는 모습, 그들은[조상]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무궁화만큼만' 아름다우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문화고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적지를 방문했다가 너무나 몰상식한 행동으로 관람객을 아연케 한 관리인을 경험한 후에 그녀는 문화재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시험을 쳐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화고시를 치르고 당당하게 현장에서 근무하고 대우받으며 "난 첨성대에서 10년 근무했다"는 사실을 이력으로 내세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길 원한다.
"첨성대에 관한 한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깊고 다양한 체험을 한 사람은 없다, 뭐 이런 자랑을 하는 젊으니들이 우글우글 나와야 한다. 나는 첨성대에 대해서 열 시간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뭐 이런 자랑이 쉽게 들려야 한다. 한여름 밤의 첨성대! 눈 덮인 첨성대 위에서 빛나는 견우성! 아침 햇살이 만드는 첨성대, 그림자의 계절별 변화에 대한 신화적인 고찰, 뭐 이런 제목의 논문들이 막 쏟아져 나와야 한다. 일 년이면 분황사에 관한 글만도 수천 점이 나와야 한다. 태종무열왕능을 바라보면서 신혼 첫밤을 보내고 또한 임종을 편안히 맞는 그런 인생도 수없이 나타나야 한다. 샤갈보다 더 오래 그림 그린 화가 김점선! 물 속의 태종무열왕능을 바라보면서 102세에 임종하다, 뭐 이런 기사가 아주 당연히 매일 신문에 실려야 한다."
그녀는 이처럼 독창적인 생각을 발랄하게 떠들다 갔다. 아쉽게도 너무 일찍. 120세의 절반을 조금 더 살고.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2009년 63세의 나이로 잠들었다. 그녀가 좀 더 살아서 더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즐거움을 주었더라면... 이렇게 뒤늦게 그녀의 부재를 아쉬어한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숙대에서 강의하다가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을 살다가 감형되어 1988년에 출소하셨다.
신영복 씨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생겨난 건 그의 글 "청구회 추억"을 어느 수필집에서 읽고 나서였다. 숙대 교수 시절 서오릉으로 동료들과 소풍을 나갔다가 그곳에서 가난한 아이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그가 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참 특별했다. 아이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고, 대화를 이어지게 할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하는 그의 배려와 치밀함이 놀라웠다. 그의 접근 방식은 통했고 아이들과 그는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지속적으로 만난다. 가난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그 미래를 위한 작은 대책으로 애들이 자립하는 힘을 길러주는 방안도 생각해내고, 이들의 관계는 삶의 스승과 제자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스승은 잡혀가고 만남은 기약없어진다. 공안당국은 청구회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만났던 것까지 간첩조직으로 추궁하고 선생은 이 어이없는 죄목에 그저 말을 잃을 뿐이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의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와 엽서를 수록해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동생, 형수와 계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염려와 충고가 있고, 감방 생활의 경험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성찰, 자기반성, 더나은 삶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작은 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깊은 사색을 통해 진실을 찾아내는 통찰력,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 선생의 지적 힘이 놀랍고 투철한 성찰적 삶이 커다란 본보기가 된다.
'관계가 존재'라는 화두로 21세기의 삶이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그의 사상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고독한 섬이 되어가는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공동체와의 연결이 필요하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삶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됨을 자각하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내 삶의 각성제가 되었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최고의 교사
방송을 보지는 못했고 우연한 계기로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방송 다큐멘타리는 "위축된 공교육의 현실 속에서 상처받은 교사들을 응원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공교육이 붕괴되고 교육이 사교육장으로 넘어가버린 현실에서 여전히 아이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하는 공교육의 교사들. 그들 중 몇 몇이 대표주자로 선정되었고,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교실에서 나름대로 계발한 교수법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국, 영, 수, 역사, 지리, 음악, 도덕, 통합논술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을 밀착 취재하여 그들의 생각과 열정, 그리고 수업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기대가 컸고 첫 주자인 국어교사 송승훈 선생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내 학창시절에도 이런 선생님이 지도해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러워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매 장마다 붙어 있는 교사의 공부 팁과 대학을 간 제자들의 스승 예찬의 글이 어딘지 불편했다. 그래서 이 책도 결국 어떻게 하면 공부 잘해서 대학에 잘 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학습법에 관한 책이라는 인상이 짙어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기에 소개된 교사들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수업에 대한 열정은 충분히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업하는 교사들이 많아지면 공교육도 살아나고 아이들도 입시 위주의 공부가 아닌 평생 살아나가는 데에 밑거름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싹튀울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교육 체제에서 과연 이들의 노력이 희귀한 사례에 그치지 않고 공교육 현장에 새로운 모델로서 바람을 일으키며 확산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심기가 불편한 교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고, 또 다른 학습법 책일 뿐이라는 신랄한 비판도 있다. 출판사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케팅 전략으로 책을 편집한 의도를 감지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이, 아니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고, 교사는 어떻게 학생과 소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이 보여준 건 확실하다. 교사의 자질로서 필요한 건 학생들에 대한 애정, 관심,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건 교수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교수법의 의미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스킬이 아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어찌보면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표현된 소통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법에 대한 고민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없고 사랑의 표시만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마음 속에 아무리 큰 사랑이 들끓어도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고 전달하지 못하면 누가 그 사랑을 알 수 있을까.
교사의 사랑도 결국은 교수법을 통해 발현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어렵기로 이름난 아도르노의 책을 조금 맛보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사상은 철학, 윤리학, 문화, 자본, 미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고 독특한 사상체계와 비유, 은유적 표현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아도르노 사상의 핵심은 '동일성'에 대한 사유라고 한다. 이성을 앞세운 서구의 합리주의는 개념과 사안(Sache, 대상이 되는 사태)을 강제로 일치시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켜 왓다. 이런한 '동일성' 사고는 대상을 지배하는 착취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는 개념과 사안이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래서 그는 "사안은 개념보다 크다", "전체는 비진리다"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안은 개념을 통하지 않고선 인식될 수 없다'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동일성 사유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한 것이 '부정변증법'이다.
쉬운 예로 "이순예는 여성이다"는 동일성 사유에 근거한 서술이라면 "이순예는 남성이 아닌 인간이다"와 같은 부정적 진술이야말로 보다 객관적인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아도르노의 핵심적 사상은 사실 누구라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단순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어떤 대상이나 사안이 결코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포던의 시대에 와서야 이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물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성 사유의 틀은 완전히 깨지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판에서,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시민의 생각 속에...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이십억 광년'이란 수식어로 고독의 의미를 강렬하게 증폭시켜 놓아 아득하게 떨어질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이 느껴졌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인간의 고독을 전지구적 고독으로 묘사하고 우주 속의 고독으로 끌어올린다.
고독 속에 별들은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주는 점점 팽창해 가고 서로 간의 거리는, 고독은 더욱 커져간다.
마지막 줄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는 무슨 뜻인가?
그 어마어마한 고독을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나오는 생리적 반응으로서의 재채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 그 무력감을 상징하는 것일까?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로렌스 더렐
그의 걸작 <알렉산드리아 4중주>(The Alexandria Quartet)는 1957~1960년에 출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중간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 시리즈며 정치 스릴러다. 존 그리셤의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가 다시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평가된다.
한편으로는 인종, 종파, 언어가 한 공간에 채워졌지만 그 결과 극도로 분열된 세계에서 사랑과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많은 현실이 있는데" 어떻게 단 하나의 진실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의 관점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고 한 캐릭터 조차도 다중인격의 프리즘을 통해 관점은 사분오열된다.
데렐은 인도에서 3세대 앵글로-아이리시 식민지 주민으로 성장했고 이러한 개인적 성장 배경은 22세 때 "나는 인도인의 가슴과 영국인의 피부를 가졌다"라는 깨달음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일종의 심리적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영국 생활을 치통처럼 견디지 못해 떠돌아 다니며 자신을 '직업적 난민'으로 이해한 더렐은 영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실험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적어도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겪게될 심리적 방황과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소설이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이미 히트를 친 청소년 소설 <완득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전히 다문화 아이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다문화 공동체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무늬를 그려내는 작품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하는 경우 이민결혼자를 소재로 한 <라오 라오가 좋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주요한 이슈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앞으로 좀 더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7가지 감정
"무엇을 인간의 정이라고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喜怒愛懼哀惡欲)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이다."
기쁨, 분노, 사랑, 두려움, 슬픔, 싫어함, 욕구가 칠정이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며, 발동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의 보편적인 길이다."
사단칠정에서 사단은 본성이 나타난 것으로 순수하게 선한 정이고, 칠정은 아직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정감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칠정이 발동해 객관적인 상황에 맞으면 선이고, 어긋나면 악이다.
사실 인간의 감정은 위의 네 가지, 일곱 가지 이상으로 복잡미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통, 억울함, 서운함, 등 좀 더 세부적인 감정들이 즐비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도 있고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도 존재한다.
사실 어찌보면 인간의 삶은 많은 부분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감정이 어떻게 잘 표현되고 조절되고 분출되느냐에 따라 사는 게 순탄할 수도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교에서는 감정이 발동했을 때 그것이 적절한 경우에는 그것이 조화롭다는 의미에서 和 라고 하면서 선한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상황에 맞게 감정이 표출되면 적절하고 자신과 세계와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웃는 것은 이 조화가 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악이 된다.
하루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한 번 관찰해 보고 싶다. 그것이 적절한 것인지, 그래서 내 정신 건강에 좋은 건지.
요즘은 '감정 코칭'이란 말을 많이 쓴다.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라는 의미로 특히 부모교육에서도 강조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감정을 조절하라는 것이 가능하면 이성적으로 아이를 대하라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감정이 앞서면 어떤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큰소리도 대들 때, 그저 이성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정말 바람직할까? 엄마도 감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적절하게 표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치유하는 책 읽기
그러다 침대 옆 탁자에 읽다가 놔둔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북섬 2007)가 눈에 들어왔고 다시 손에 잡았다. 그리고 위안을 얻었다.
저자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
"내게는 오직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적은 대영제국입니다. 두 번째 적은 인도 국민으로, 이는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그렇지만 내게 가장 만만찮은 적은 간디라는 남자입니다. 내게 그는 참으로 벅찬 상대입니다." (176)
"내 정신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내 편협한 시각과 헛된 기대와 실체 없는 두려움입니다."
이 말을 읽으면서 내 자신 속의 실체 없는 두려움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치유되었다.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네 가지
퇴계 이황의 철학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최영진의 <퇴계 이황>(살림 2007)에서 '사단 칠정'에 대해 읽었다. 퇴계가 자신보다 26살 어린 기대승과 8년에 걸쳐 토론을 하며 한국적 성리학의 기초를 닦게 된 유명한 '사단 칠정론'의 얘기다.
여기서 '사단'이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갖고 있다. (-)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애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이 사실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이다. 인간이 사단(四端)(네 가지 단서)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이 사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이 있는데 스스로 도덕적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며, 그 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 네 가지, 사단을 갖고 태어난다는 얘기다. 사단이란 인의예지라는 본성이 발현된 정감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마음인 '측은지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인 '수오지심',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인 '사양지심',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 이렇게 네 가지다.
유교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천착을 한 이유는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각 개인이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해 배우면서, 아이들의 인성교육을 어떻게 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이 네 가지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치면 아이들은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물론 성인들도 자신 속에 내재한 이 네 가지 본성을 제대로 발현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수양해야 하는 게 더 필요한지도.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는 거니까.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겸재의 인왕산 수성동 계곡
그림 속에 나오는 돌다리도 그대로 남아 있고, 주위에 전통 정자 '사모정'도 설치하고 이곳을 기념물 제 31 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인왕제색도"를 미술사 강의에서 보고 난후, 작년에 서울 성곽을 한 바퀴 도는 순성놀이에 참여하면서 그림 속의 바위산을 직접 눈으로 봤었다. 그리고 그 장엄한 풍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언제 시간을 내서 수성동 계곡에도 가봐야지.
요즘은 자연이 좋고, 자연을 사랑했던 조선의 선비와 예인들이 좋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다.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갈라파고스 거북이
1835년 26세의 젊은 청년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왔고 그곳에 5주 동안 머물면서 연구를 위한 표본을 채집했다. 다윈은 이를 토대로 자신의 진화론을 탄생시킨다. 핀치새가 사는 섬마다 부리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모든 생물이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거나 도태한다는 '적자생존'의 이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거북이 역시 사는 섬에 따라 특징이 조금씩 달라 11가지 아종(亞種)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 중 한 종이 코끼리거북이다. '외로운 조지'는 자신이 속한 아종의 마지막 한 마리였고 백살을 조금 넘겼다. '외로운 조지'는 종족 보존에 의욕을 보이지 않아 짝짓기를 해도 무정란만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외롭게 홀로 남아 살다가 죽었다.
'갈라파고스'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거북이'를 뜻한다고 한다. 이 이름은 1535년에 파나마 주교였던 토마스 드 베를랑가가 풍랑에 밀려 이 섬에 들어왔고, 온 섬을 뒤덮은 거북이를 기억하고 나중에 지도 제작에 이 섬을 그려넣을 때 이름을 '갈라파고스'로 붙였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에콰도르 서쪽 972km 태평양 상에 19개의 화산섬과 암초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외진 곳이어서 외부 사람들이 찾아가기 힘들었고 그 덕분에 희귀한 생물 종이 오랫동안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화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에 와서 선원과 어민들의 포획으로 수십만 마리에 달하던 거북이도 지금은 2만 마리 남짓 남아 있다고 한다.
'외로운 조지'가 종족 보존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생물이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한다는 진화론에 이제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 생존을 거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이론이 덧붙여져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환경이 더 이상 살 만하지 않을 때, 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공부지옥에서 시달리다 더 이상 적응 못하고 삶을 던져버리는 아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2012년 6월 9일 토요일
인생의 밭
질풍 노도의 파도에 나 역시 파도타기를 하는 느낌이 들고, 걱정, 불안, 절망, 두려움이 교차되는 순간들이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느낌있게 다가오고, 자식 없이 자유로운 친구들을 보면 잠시 부럽기도 하다.
그러다가 서영은의 짧은 글 '결실'을 읽었다. 그녀의 책 <일곱 빛깔의 위안>에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인생의 밭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결실에 대해 얘기한다.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어 땀과 노력의 결실인 열매와 곡식을 얻게 되는 농사와 달리 인생의 밭에서 얻는 결실은 책임감이라고 한다. 인생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인생 농사는 관계를 심고 거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관계의 결실은 책임감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결혼을 한다는 건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의 씨를 뿌리는 것이고 자식을 갖는 것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씨의 결실은 책임감으로 완성된다는 것.
파트너를 끝까지 책임지고, 부모를 책임지고, 자식을 책임지는 일, 그것이 '관계'의 결실이고 인생 수확기의 결실이 된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령 시부모나 남편이 중병이 들었을 때, 며느리나 아내의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들은 그 상황을 전적으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 힘겨움에도 그 상황을 온전히 떠맡는 것이 관계의 거둠이고 결실이다. 여기에는 농부들처럼 지금까지 땀과 노력을 바친 만큼의 결과를 앉아서 따먹는 식의 손에 쥐는 열매가 없다. 그러나 그 거둠이 책임감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자기를 태워 빛을 발하는 것이고,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더 많은 알곡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우리가 결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즉 직업적 성공이나 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보상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고 또 다시 '관계'를 맺고 책임을 다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부모는 먼저 난 사람들로서 나중에 난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고, 나중에 난 사람은 또 다시 그 이후에 오는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인생을 공동체 전체의 연속성 속에서 바라본다.
"나의 죽음이나 변용은 전체성 속에서 결실로 거두어지게 된다. 먼저 난 사람들이 있기에 나중 난 사람이었던 우리가 어느새 먼저 난 사람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와 있다. 위로도 아래로도 책임질 관계의 중심부에 자리한다. 그 책임을 얼마나 성심껏 치러 내느냐에 따른 열매는 나중 오는 사람들 속에서 거둠의 넓이나 깊이로서 감지될 것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걱정보다 내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다. 자식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책임 질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가 맡은 책임이 아닐까 싶다. 그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자신과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길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잠시 위안을 얻는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고통과 힘겨움이 따르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는 힘듬이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큰 위안이 된다.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차등적 사랑'
한국의 지성인들과 글쓰기를 주제로 대담한 내용이나 이들의 글을 모아 엮은 <글쓰기의 최소원칙>((경희대학교출판국 2008)에서 배병삼 교수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무엇보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그런 후에 구절, 문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로서 그는 <맹자>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의미가 각각 다른 단어로 쓰여 있고, 따라서 그 사랑의 의미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등적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맹자의 글을 인용해보자.
"군자란 사물(物)에 대해선 애(愛)하되 인(仁)하지 않으며, 백성(民)에 대해선 인(仁)하되 친(親)하지 않는다. 어버이(親)에 대해선 친(親)하며, 백성에 대해선 인(仁)하며, 사물에겐 애(愛)하느니라."
여기서 인, 애, 친, 은 모두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맹자는 이 단어를 각기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부모에게 쓰는 사랑인 친(親)은 가장 고급하고, 백성들에게 쓰는 사랑인 인(仁)은 그 다음이고, 사물에 대해 베푸는 사랑인 애(愛)는 가장 하천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를 그냥 '사랑'으로 번역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없고 유교 사상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 사랑, 사랑을 등급으로 나누는 철학적 특성을 간과하게 된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사랑은 아끼는 정도이고 백성에 대한 사랑인 인은 관계를 맺는, 소통하는 사랑이어서 일방적이지 않고,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전폭적인 사랑, 절대적 사랑이라고 본다.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고전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으니 원서를 보면서 한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현대식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그 의미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모든 번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고전을 공부할수록 한문을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고 있는데 이제 그 절실함이 더 커졌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주마간산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책을 구입해 함께 잠자리에서 매일 한 챕터씩 읽고 있다.
한 번은 '바쁘다고 느껴질 때'라는 소제목 대화문을 읽는데 '주마간산'(走馬看山)'이란 말이 나왔다. '달리는 말을 타고 산천을 구경한다'는 말로,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대충대충 보고 지나간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란 걸 대충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이 말의 뜻을 재음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게 지내느라 현재를 놓치고 산다. 꿈과 목표를 좇아서, 혹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향해 좇아가느라, 진작 살아내야 할 지금, 현재는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현재는 미래에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천히 속도를 늦춰 주위를 돌아보면 세상은 볼거리도 흥미거리도 많다. 소소한 것들, 일상의 행위들,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구름이 예쁘게 피어난 하늘, 새롭게 움트는 싹과 피어나는 꽃, 아이들의 순진한 얼굴과 맑은 미소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쁨 속에서 생의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바쁜 삶이란 게 현대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는데,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바쁘게 산 모양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달렸겠지만.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달리긴 쉽지 않다. 그러니 자동차에서 내려 자전거로 옮겨 타자. 아니면 걷기도 괜찮다. 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 씨가 쓴 책 제목 <천천히가 좋아요>처럼 천천히 사는 것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지혜다.
2012년 5월 8일 화요일
수필의 발견
문학을 좋아해서 공부도 했었지만 수필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특별히 쏟은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이제 수필반에 들어와 글쓰기도 해야 할 판이 되니 수필을 어떻게 쓰나, 궁금해진다. 수업 중에 이미 몇 편의 글을 읽긴 했다. 피천득의 <수필>, 도창희의 <설산유정>, 그리고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 그것이다.
수필의 대가인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설명한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로부터 시작해 "수필은 독백이다."까지 다양하게 정의를 내린다. 수필은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는 말도 하고, 수필은 "온아 우미"하다고도 한다. 수필은 또한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라고도 한다.
수필은 어떻게 보면 쉽게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듯 하지만 그것이 수필 문학이 되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 장르다. 이전에는 수필을 좀 얕잡아본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이나 시, 희곡에 비해 수필은 한 단계 낮은 문학이라는 말도 안 되는(지금 와서 깨달았다)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수필의 세계 역시 다른 문학 장르만큼 아름답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염정임의 <우리집 책들의 결혼>을 읽으면서 고급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을 발견한다. 유려하고 감각적으로 쓰인 짧은 글 속에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체는 큰 문학적 감동을 준다. 작가의 다른 책 두 권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놓았다.
한동안 수필 애독자가 될 것 같다.
2012년 3월 1일 목요일
릴케의 편지
릴케2012년 2월 27일 월요일
책만 보는 바보
보림 출판사에서 나온 <책만 보는 바보>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다. 지은이 안소영은 수십 권의 책을 참고해서 이덕무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와 만났고, 그 결과를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가 그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책 속의 주인공을 금방 친구 삼듯, 이 문을 드나드는 어린이들이 옛사람들과 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가슴속에 새로운 상상과 사실로 문을 내 더 많은 역사 속 인물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이런 소망은 적어도 나의 경우 충분히 이루어졌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아마 이름 석자만, 그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한 인간과 아주 가깝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서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궁핍한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평생 책을 벗삼아 살았다. 궁핍한 삶 속에서 책은 그의 삶의 스승이었고, 벗이었고, 가끔은 먹여살리는 밥이기도 했다. <맹자>를 팔아 식솔의 굶주림을 달랬던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책을 팔아 술을 산 유득공과의 우정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이덕무는 주위에 많은 벗들이 있었다. 사우 관계였던 박지원, 스승으로 모신 홍대용, 북학자였던 박제가, 무사였던 처남 백동수, 자신보다 어린 벗이었던, 하지만 깊이 있게 학문을 논할 수 있었던 이서구, 조선의 역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판 유득공이 그의 벗이었다. 저자의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들 한 명 한 명이 살아나도록 만든다. 역사 교과서에서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 뼈와 살이 있는, 생각과 마음이 엿보이는 한 인간으로 살아났다.
이덕무의 삶을 통해, 그리고 그의 벗을 통해, 조선시대의 실상을 엿본다. 서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글만 읽는 양반들이 얼마나 일반 백성의 궁핍한 삶에 무관심했는지, 선비의 삶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었는지를 실감했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던 젊은 선비들은 그만큼 비판 의식이 강했고 사회개혁의 욕구가 컸다. 다행이도 조선의 뛰어난 왕 중 한 명인 정조는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채용하지만, 이덕무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정조 역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왕과 젊은 학자들이 좀 더 오래 살아 국가의 기반을 다져놓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다르게 흘렀을까.
이덕무의 초상을 찾을 수 없어, 그의 글씨를 올려놓았다. 검서관으로 일했던 그는 꼼꼼하고 섬세한 학자였다. 그의 글씨를 보며 그의 심성을 짐작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