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려온 김점선의 <10cm 예술>을 읽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김점선의 그림은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고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박완서 선생 등과 친한 사이였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그림이 주는 천진성과 장식적인 느낌 때문에 진지하게 그녀의 예술을 평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서야, 그녀가 죽고 3주기가 되고 나서야 그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빈 자리를 아쉬어 하면서...
<10cm 예술>을 소장하고 싶어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니 이미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책들은 다행이도 출판된 게 많았다. 그 중 <나, 김점선>은 깊은샘에서 1998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온 후 2007년에 2쇄를 찍었다.
책의 서두에 소설가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최윤은 김점선을 '점선을 닮은 사람'이라고 칭한다. "나타난 것과 숨은 것의 비율이 일정한 점선", "본질에 직접 당도할 줄 아는" 점선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쓴 글들을 읽으며 (이 책은 그녀의 어린시절의 기억에서부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겪은 일상의 면면을 그려내고 있다), 그녀가 참으로 직설적으로, 담백하게, 본질에 다다르며 생을 살았다는 걸 느낀다.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자 했고, 도발적으로 결혼한 한 남자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지혜롭고 따뜻한 엄마의 마음을 지녔던 그녀. 독창적인 그녀의 사고는 모든 관습과 허위를 깨부수며 자신의 길을 걸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넉넉한 사랑으로 세계를 자신 속에 품었었다.
그녀는 어떤 일에 한 번 몰두하면 뭔가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사람들이 무궁화꽃이 촌스럽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왜 그런 꽃이 우리나라의 국화가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꽃을 관찰한다. 마당에 무궁화 꽃을 심고 물을 주면서 관찰한다. 꽃이 벌레에 먹혀 줄기와 가지만 남긴 채 꽂꽂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걸 보고 계속 물을 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궁화가 다시 활짝 꽃을 피운 걸 보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그녀. "싱싱하고 건강한 아름다움, 숨겨진 듯한, 얼핏 눈에 띄지 않는 모습, 그들은[조상]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무궁화만큼만' 아름다우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문화고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적지를 방문했다가 너무나 몰상식한 행동으로 관람객을 아연케 한 관리인을 경험한 후에 그녀는 문화재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시험을 쳐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화고시를 치르고 당당하게 현장에서 근무하고 대우받으며 "난 첨성대에서 10년 근무했다"는 사실을 이력으로 내세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길 원한다.
"첨성대에 관한 한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깊고 다양한 체험을 한 사람은 없다, 뭐 이런 자랑을 하는 젊으니들이 우글우글 나와야 한다. 나는 첨성대에 대해서 열 시간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뭐 이런 자랑이 쉽게 들려야 한다. 한여름 밤의 첨성대! 눈 덮인 첨성대 위에서 빛나는 견우성! 아침 햇살이 만드는 첨성대, 그림자의 계절별 변화에 대한 신화적인 고찰, 뭐 이런 제목의 논문들이 막 쏟아져 나와야 한다. 일 년이면 분황사에 관한 글만도 수천 점이 나와야 한다. 태종무열왕능을 바라보면서 신혼 첫밤을 보내고 또한 임종을 편안히 맞는 그런 인생도 수없이 나타나야 한다. 샤갈보다 더 오래 그림 그린 화가 김점선! 물 속의 태종무열왕능을 바라보면서 102세에 임종하다, 뭐 이런 기사가 아주 당연히 매일 신문에 실려야 한다."
그녀는 이처럼 독창적인 생각을 발랄하게 떠들다 갔다. 아쉽게도 너무 일찍. 120세의 절반을 조금 더 살고.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2009년 63세의 나이로 잠들었다. 그녀가 좀 더 살아서 더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즐거움을 주었더라면... 이렇게 뒤늦게 그녀의 부재를 아쉬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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