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8일 화요일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독일의 현대 지성 중 한 명인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의 강의록 시리즈가 국내에 번역되어 첫 선을 보였다. <부정변증법 강의>(세창 출판사, 이순예 역)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다른 강의록이 앞으로 소개될 것이라고 한다.(한겨레 2012.8.29)

어렵기로 이름난 아도르노의 책을 조금 맛보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사상은 철학, 윤리학, 문화, 자본, 미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고 독특한 사상체계와 비유, 은유적 표현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아도르노 사상의 핵심은 '동일성'에 대한 사유라고 한다. 이성을 앞세운 서구의 합리주의는 개념과 사안(Sache, 대상이 되는 사태)을 강제로 일치시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켜 왓다. 이런한 '동일성' 사고는 대상을 지배하는 착취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는 개념과 사안이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래서 그는 "사안은 개념보다 크다", "전체는 비진리다"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안은 개념을 통하지 않고선 인식될 수 없다'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동일성 사유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한 것이 '부정변증법'이다.
쉬운 예로 "이순예는 여성이다"는 동일성 사유에 근거한 서술이라면 "이순예는 남성이 아닌 인간이다"와 같은 부정적 진술이야말로 보다 객관적인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아도르노의 핵심적 사상은 사실 누구라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단순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어떤 대상이나 사안이 결코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포던의 시대에 와서야 이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물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성 사유의 틀은 완전히 깨지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판에서,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시민의 생각 속에...

이십억 광년의 고독

제목에 꽂혀서 나니카와 슌타로의 시선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샀다.
'이십억 광년'이란 수식어로 고독의 의미를 강렬하게 증폭시켜 놓아 아득하게 떨어질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이 느껴졌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인간의 고독을 전지구적 고독으로 묘사하고 우주 속의 고독으로 끌어올린다.
고독 속에 별들은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주는 점점 팽창해 가고 서로 간의 거리는, 고독은 더욱 커져간다.
마지막 줄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는 무슨 뜻인가?
그 어마어마한 고독을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나오는 생리적 반응으로서의 재채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 그 무력감을 상징하는 것일까?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로렌스 더렐

로렌스 더렐(1910-1990)은 세계화와 다민족적 정체성의 시대에 삶의 수수께끼를 가장 먼저 탐구한 작가로 평가된다.(뉴스위크, 2012.8.29)

그의 걸작 <알렉산드리아 4중주>(The Alexandria Quartet)는 1957~1960년에 출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중간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 시리즈며 정치 스릴러다. 존 그리셤의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가 다시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평가된다.

한편으로는 인종, 종파, 언어가 한 공간에 채워졌지만 그 결과 극도로 분열된 세계에서 사랑과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많은 현실이 있는데" 어떻게 단 하나의 진실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의 관점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고 한 캐릭터 조차도 다중인격의 프리즘을 통해 관점은 사분오열된다.

데렐은 인도에서 3세대 앵글로-아이리시 식민지 주민으로 성장했고 이러한 개인적 성장 배경은 22세 때 "나는 인도인의 가슴과 영국인의 피부를 가졌다"라는 깨달음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일종의 심리적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영국 생활을 치통처럼 견디지 못해 떠돌아 다니며 자신을 '직업적 난민'으로 이해한 더렐은 영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실험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적어도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겪게될 심리적 방황과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소설이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이미 히트를 친 청소년 소설 <완득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전히 다문화 아이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다문화 공동체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무늬를 그려내는 작품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하는 경우 이민결혼자를 소재로 한  <라오 라오가 좋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주요한 이슈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앞으로 좀 더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7가지 감정

유교 사상에서 인간의 감정은 7가지로 구별된다. '칠정'이 그것인데 <예기> '예운' 편에 이렇게 나와 있다.

"무엇을 인간의 정이라고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喜怒愛懼哀惡欲)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이다."

기쁨, 분노, 사랑, 두려움, 슬픔, 싫어함, 욕구가 칠정이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며, 발동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의 보편적인 길이다."

사단칠정에서 사단은 본성이 나타난 것으로 순수하게 선한 정이고, 칠정은 아직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정감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칠정이 발동해 객관적인 상황에 맞으면 선이고, 어긋나면 악이다.

사실 인간의 감정은 위의 네 가지, 일곱 가지 이상으로 복잡미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통, 억울함, 서운함, 등 좀 더 세부적인 감정들이 즐비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도 있고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도 존재한다.

사실 어찌보면 인간의 삶은 많은 부분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감정이 어떻게 잘 표현되고 조절되고 분출되느냐에 따라 사는 게 순탄할 수도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교에서는 감정이 발동했을 때 그것이 적절한 경우에는 그것이 조화롭다는 의미에서 和 라고 하면서 선한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상황에 맞게 감정이 표출되면 적절하고 자신과 세계와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웃는 것은 이 조화가 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악이 된다.

하루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한 번 관찰해 보고 싶다. 그것이 적절한 것인지, 그래서 내 정신 건강에 좋은 건지.

요즘은 '감정 코칭'이란 말을 많이 쓴다.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라는 의미로 특히 부모교육에서도 강조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감정을 조절하라는 것이 가능하면 이성적으로 아이를 대하라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감정이 앞서면 어떤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큰소리도 대들 때, 그저 이성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정말 바람직할까? 엄마도 감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적절하게 표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치유하는 책 읽기

마음이 산란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의 미래가  걱정되어 불안감이 내 영혼을 잠식할 듯했다. 신경은 끝없이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이 되면서 마음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침대 옆 탁자에 읽다가 놔둔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북섬 2007)가 눈에 들어왔고 다시 손에 잡았다. 그리고 위안을 얻었다.

저자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

"내게는 오직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적은 대영제국입니다. 두 번째 적은 인도 국민으로, 이는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그렇지만 내게 가장 만만찮은 적은 간디라는 남자입니다. 내게 그는 참으로 벅찬 상대입니다." (176)

"내 정신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내 편협한 시각과 헛된 기대와 실체 없는 두려움입니다."

이 말을 읽으면서 내 자신 속의 실체 없는 두려움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치유되었다.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네 가지

요즘 개콘에서 '네 가지' 코너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인기 없고, 촌놈이고, 키 작고, 뚱뚱한 네 남자가 나와 자신의 '단점' 때문에 생기는 오해에 대한 불만과 해명을 늘어 놓고 있다.

퇴계 이황의 철학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최영진의 <퇴계 이황>(살림 2007)에서 '사단 칠정'에 대해 읽었다. 퇴계가 자신보다 26살 어린 기대승과 8년에 걸쳐 토론을 하며 한국적 성리학의 기초를 닦게 된 유명한 '사단 칠정론'의 얘기다.

여기서 '사단'이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갖고 있다. (-)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애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이 사실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이다. 인간이 사단(四端)(네 가지 단서)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이 사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이 있는데 스스로 도덕적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며, 그 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 네 가지, 사단을 갖고 태어난다는 얘기다. 사단이란 인의예지라는 본성이 발현된 정감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마음인 '측은지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인 '수오지심',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인 '사양지심',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 이렇게 네 가지다.

유교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천착을 한 이유는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각 개인이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해 배우면서, 아이들의 인성교육을 어떻게 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이 네 가지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치면 아이들은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물론 성인들도 자신 속에 내재한 이 네 가지 본성을 제대로 발현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수양해야 하는 게 더 필요한지도.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는 거니까.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겸재의 인왕산 수성동 계곡

진경 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 정선이 인왕산과 북악산에 걸친 장동 일대의 경승지 8곳을 그려 "장동팔경첩"으로 남겼었다. 그 중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그린 작품 속의 모습을 서울시가 복구 재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림 속에 나오는 돌다리도 그대로 남아 있고, 주위에 전통 정자 '사모정'도 설치하고 이곳을 기념물 제 31 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인왕제색도"를 미술사 강의에서 보고 난후, 작년에 서울 성곽을 한 바퀴 도는 순성놀이에 참여하면서 그림 속의 바위산을  직접 눈으로 봤었다. 그리고 그 장엄한 풍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언제 시간을 내서 수성동 계곡에도 가봐야지.
요즘은 자연이 좋고, 자연을 사랑했던 조선의 선비와 예인들이 좋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