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에 노라노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떴다. 노라노, Nora Noh가 영문이름이다. 한국어 이름은 노명자. 17살에 결혼하고 19세에 이혼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47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후 디자이너로 성공해 85세인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코코 샤넬이라는데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그에 대해 다큐 영화를 만들었고, 31일 개봉된다고 한다.
그녀의 삶은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 문화사와 여성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신여성을 위해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냄으로써 여성이 자신감과 개성을 뽐내며 사회로 진출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한다. 85세인데 사진은 그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모랑 함께 내 어린 시절 지방도시에 첫 양장점을 개업하고 몇년간 그곳 어성들의 멋을 이끌어간 어머니는 유학도 갈 수 없었고,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가는 것조차 이룰 수 없었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며 패션 수업을 받은 언니와 함께 나름 감각을 익혀 옷을 디자인하고 실전을 통해 패션을 배워갔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그 도시에선 알아주는 이름난 양장점으로 자리잡았던 걸 보면 나름 지방의 패션을 주도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 어린 시절 피아노 연주회를 위해 지어주신 드레스도 생각나고, 와인색 겨울 코트는 디자인이 꽤 독특해서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기성복 산업이 발전하고 이에 밀려 양장점과 의상실이 사향길로 들어섰다. 이에 발맞춰 어머니는 기성복 브랜드 매장을 여셨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방에서 수제식 방식으로 양장점을 운영하던 여성이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생리를 제대로 알고 계시지 못했을 수도 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갑을 관계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동안 성업을 했지만 점점 더 많은 브랜드가 등장하고 사업수완이 별로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빚을 지고 문을 닫았다. 그 이후에도 작은 의상실을 내서 다시 도전하셨지만 결국 힘들게 꾸려가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어딘가 깊숙이 넣어둔 옛 사진을 꺼내 보고 싶다. 그 당시 멋쟁이였던 엄마 모습도 그립고, 초등 6학년 때 직접 지어주신 옷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모습을 찍은 사진도 다시 들여다 보고 싶다. 엄마가 다른 환경에 처했더라면,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면 자신의 패션 감각을 제대로 살려 성공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지나간 시간 속의 기억을 좇아가보고 싶다.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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