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4일 일요일

사리다

김훈의 짧은 글 "밧줄의 아름다움"에서 '사리다'가 이미 알고 있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된 경우를 알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리다'는 '몸을 사리다'로 쓰일 때 의미였는데 '밧줄을 사리다'라는 의미로 쓰였길래 사전을 찾아봤다.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사리다 1) (국수나 새끼 따위를)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어 감다 2) (뱀 따위가 몸을) 똬리처럼 감다. 3) (비어져 나온 못끝 따위를) 꼬부려 붙이다. 4) (겁먹은 짐승 따위가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끼다. 5) (몸을) 아끼다. "몸을 ~ "6) 정신을 바짝 가다듬다 "마음을 사려 먹고 굴속으로 들어가다"

그러니까 '밧줄을 사라다'에서의 의미가 '사리다'의 첫째 의미였던 거다. 그런데 5의 의미만을 알고 있었으니... 내가 안다고 믿었던 단어의 의미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다.

"선원들은 밧줄을 소중히 다룬다. 밧줄이 엉키거나 꼬이지 않도록 늘 가지런히 사려놓는다."

김훈은 이 글에서 배의 선원들이 사용하는 밧줄, 암벽등반가의 자일, 소방관들이 서로를 엮는 호스와 같은 밧줄이 왜 아름다운지를 쓰고 있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됨으로써,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밧줄의 아름다움이다."

2011년 4월 18일 월요일

언어와 사고

인간의 사고에 언어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현대 언어학에서 많은 연구가 되어 왔다. 모국어가 모국어 사용자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올프(Wholf)의 제안이 한동안 유력했지만 이 가설을 수정하고 확장하는 이론도 나왔다. 예를 들어 중국어에서 현재, 과거, 미래를 나타내는 동사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올프의 이론대로 한다면 중국인은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한 시간 관념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따라서 모국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긴 해도 제한적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는 어떤 의미에서 그 모국어 사용자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게 경험적 사실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몰타인에게 아내가 몇 명이냐고 물으면, 그가 여러 명의 아내가 있더라도 현재로 답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로 답하기 위해서는 부인이 바로 그 자리에, 그 시각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답은 그냥 과거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타어에서는 이런 류의 질문에 있어서 구체적인 답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국어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문장을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영어가 되지 않는 경우다. 영어에서는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써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각각의 언어가 갖는 특징이 되겠고, 이 언어의 특징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언어학에서도 이 영향의 범위를 제대로 가늠하고 측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한다.

2011년 4월 10일 일요일

대자적 존재

세상의 모든 것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와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나뉜다. 바위, 나무, 돌과 같이 생각 없이 그 자체로 머무는 것들은 즉자적 존재인 반면에, 생각하며 자신과 대면하는 존재인 인간은 대자적 존재이다.
인간은 대자적 존재임으로 해서 끊임없이 '실존'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은 이 실존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실존(實存)'은 또한 끊임없는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택은 당연히 인간을 본질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나의 선택이 옳은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실존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이 관계 역시 불안하다. 왜냐하면 상대방 역시 끊임없이 선택하며 자신의 실존적 삶을 사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계'는 불안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지옥'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간 관계는 내 실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인간 관계에서 많은 고민을 안고 있는 청소녀 딸 아이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 지옥을 내가 경험한다. 하지만 그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란 걸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선택'의 폭을 넓혀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2011년 4월 7일 목요일

성 정체성

중3 딸아이가 동성애자를 소재로 한 미드를 봤다고 한다. 친구가 소개해 줘서 같이 보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꽤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한국에서도 블로그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려 볼 수 있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딸과 친구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에 반해서, 성적 호기심이 발동해서 봤을 수도 있다. 한국의 아이돌 가수 그룹에 대한 팬픽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워낙 널리 퍼져 있고, 팬픽의 내용은 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소녀 시대를 좋아하는 딸 아이와 빅뱅을 좋아하는 딸 친구는 팬픽에서 레즈비언식의, 게이식의 동성애 연애를 픽션으로 접했을 테니까. 이런 저런 얘길 나누다 우연히 나온 동성애 이슈, 요즘 아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세태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한다. 그러면서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관습적, 도덕적 굴레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은 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이다. 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지 순진하게 묻는다.

마침 한겨레 신문에 영화감독 김조광수가 쓴 "게이가 총 들면 국민 실격?"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딸 아이와 함께 읽고 얘길 나눴다. 칼럼을 통해 동성 간의 성적 관계를 '계간'(닭들이 하는 짓)이란 말로 비하하는 것도, "계간 기타 추행을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군형법 제92조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칼럼은 헌법 11조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으로 마무리했다. 딸 아이는 필자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동성애자는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면서.

인터넷의 확산으로 수위 높은 드라마도 자유롭게 접하게 되는 요즘 아이들, 약간은 염려되지만 그래도 사고를 넓히고 개방적이 되는 잇점도 있는 것 같다. 수위 조절만 잘 되기를 바랄뿐이다.

2011년 4월 6일 수요일

ADHD와 현대인

ADHD는 영어로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의 약자이며 한국어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으로 번역된다. ADHD는 일종의 장애로 분류된다. 두뇌생리학자들은 ADHD를 '도파민'의 문제로 파악하는데 도파민은 만족감을 주는 호르몬이다. ADHD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도파민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적다고 한다.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에서 쉴새 없이 두뇌활동을 지속한다. 이렇게 시달린 두뇌는 편안할 수 없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스트레스는 쌓인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만족감을 얻기 위해, 부족한 도파민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대거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중독'된다.

현대인은 누구나 약간의 ADHD 장애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장애가 오히려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또 살아남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2011년 4월 5일 화요일

자연의 힘

인간이 자연을 본떠 만든 많은 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동일하지 않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비행기를 만들어낸 우리의 조상들 덕분에 우린 대양을 횡단하며 대륙간 이동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비행기는 추락한다. 예기치 못한 날씨 상황에 잘못 대응한 탓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새들도 폭풍 때문에 추락할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열악한 날씨 조건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본능적이고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새를 닮은 거대한 비행기는 그런 자연 본능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거대한 몸을 조종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고, 인간은 새가 아니다.
까치 둥지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 지어져 있지만 비바람에 끄떡없이 버틴다고 한다. 둥지가 헐겁고 가벼워서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나무와 함께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자연을 따라가는 것, 그것은 자연의 힘이다.
일본 원전이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파괴되고 원자력 방사능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원전이 자연의 힘 앞에서 꼼짝없이 당한 셈이다.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는 원자력 발전소는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의 결과는 재앙이다. 자연을 따르는 에너지원의 개발이 그만큼 더 절실해지는 때다. 태양과 바람을 이용한 자연에너지의 길, 그 길이 자연의 힘을 십분 이용할 수 있는, 그러면서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재앙을 막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