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하면서 우연히 보게된 방송에서 법륜 스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 해석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사는 곳에 학교를 짓고 도와주시는데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걸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나나 한 개와 빵 한 조각을 먹이기로 했고 1인당 150원이면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돈 1000원이면 한 아이가 거의 일주일간 영양보충을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스님은 빈그릇 운동을 통해 하루에 천 원 저금한 돈을 모금해서 배를 굶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돕고 계신다.
우리 돈 천 원은 다른 곳에서는 하루 생활비가 되기도 한다. 근데 그 하루 생활비도 못 버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12억이나 된다고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이 2000명, 3000명을 먹여살리는 기적이었다. 근데 그건 1000원으로 한 아이에게 일주일 동안 매일 바나나 한 개와 빵 한 조각을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달음을 얻게 된 건 처음이었다.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사실 기적이 아니었다. 그건 '사랑'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현실 가능한 일이었다.
빈그릇 운동을 통해 잉여와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 파괴를 줄이고, 남을 돕는 운동에 이미 백만인이 참여했다고 한다. 빈그릇처럼 자신을 비움으로써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우친 사람들이다.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2013년 3월 27일 수요일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
조선일보에 남진우 평론가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최근에 두 권의 평론집 <나사로의 시학>와 <폐허에서 꿈꾸다>를 12년 만에 냈다고 한다. 각각 시와 소설 비평집이다.
함께 실린 사진 속 풍경,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선 그의 옆 아래 위가 온통 책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책장 풍경. 그렇다. 작가 신경숙 씨의 남편이다. 위층은 남진우 씨의 책, 아래는 신경숙 작가의 책이 꽂혀 있다고. 16단 붙박이 책장이 빼꼭하게 성벽을 이루고 있다.
인터뷰에서 남진우 씨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인간 시각을 변화시키는 거다. 이 관점에서 문학을 능가하는 예술이 있나. 그런 점에서 문학이 가진 힘은 쇠퇴하지 않았다."
여전히 문학의 힘을 믿는 그는 문학의 죽음, 위기에 대해 떠들기 전에 제대로 된 작품을 쓰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를 꼽았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넘어서는 작가가 있다면 그를 욕하라고도 말한다. 둘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
그가 새 비평집에서 제안하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작가 보르헤스가 창안했고, 학자 푸코가 논리화한 개념이라고 소개한다. "이 세상은 단일한 세계가 하나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있는 게 아니라, 원래 다양한 세계가 있고 다양한 해석이 병렬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이러한 상상력을 구현하는 작가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을 언급한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렇다면 남진우의 평론집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그가 키워드로 잡아낸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 궁금하다.
최근에 두 권의 평론집 <나사로의 시학>와 <폐허에서 꿈꾸다>를 12년 만에 냈다고 한다. 각각 시와 소설 비평집이다.
함께 실린 사진 속 풍경,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선 그의 옆 아래 위가 온통 책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책장 풍경. 그렇다. 작가 신경숙 씨의 남편이다. 위층은 남진우 씨의 책, 아래는 신경숙 작가의 책이 꽂혀 있다고. 16단 붙박이 책장이 빼꼭하게 성벽을 이루고 있다.
인터뷰에서 남진우 씨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인간 시각을 변화시키는 거다. 이 관점에서 문학을 능가하는 예술이 있나. 그런 점에서 문학이 가진 힘은 쇠퇴하지 않았다."
여전히 문학의 힘을 믿는 그는 문학의 죽음, 위기에 대해 떠들기 전에 제대로 된 작품을 쓰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를 꼽았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넘어서는 작가가 있다면 그를 욕하라고도 말한다. 둘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
그가 새 비평집에서 제안하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작가 보르헤스가 창안했고, 학자 푸코가 논리화한 개념이라고 소개한다. "이 세상은 단일한 세계가 하나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있는 게 아니라, 원래 다양한 세계가 있고 다양한 해석이 병렬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이러한 상상력을 구현하는 작가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을 언급한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렇다면 남진우의 평론집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그가 키워드로 잡아낸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 궁금하다.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20년의 시간
동네 영화 모임을 우연히 알게 되어 얼마전부터 옛날 영화들을 보고 있다. 격주로 열리는 모임인데 매번 참석은 못해도 한 번씩 시간 나는대로 가본다. 기대했던 것보다 영화 본 후 토론이 꽤 잘 이루어져서 계속 가게 되었다. (물론 아닐 때도 있다. 사람이 적게 모일 땐 그렇다).
이번 주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를 봤다. 1993년에 만들어진 영화,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독일 뮌헨 영화제에 소개된 이 영화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면서 전율과 감동으로 가슴 떨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20년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영화가 어떻게 다가올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한 마디로 영화는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년 전 너무나 강렬하게 내 가슴을 흔들었던 영화였던만큼 장면 하나하나 기억에 남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작은 화면으로 보는 장면들은 크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물론 순간 순간 여전히 매혹적인 영상들도 있었다. 홀리 헌터의 표정 연기, 광활한 바다와 그 앞에 놓여진 피아노... 영혼을 일깨우는 낭만적 무한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했다.
6살 때부터 말을 잃은 에이다는 어린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온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으로만 신부를 알고 있다가 처음으로 에이다를 본 남편은 그녀의 몸이 작은 것에 실망한다. 영국인으로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원주민 땅을 사들이는 남편은 서구적 문명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가부장적, 상업적 마인드를 가진 그는 아내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해변에 남겨두고 온다.
피아노가 에이다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감지한 원주민 남자는 그녀를 위해 남편과 거래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피아노를 사들여 에이다가 자기 집에서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이다. 남편에게는 피아노 교습을 받겠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그렇게 에이다는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고 둘 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은 에이다의 검지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냄으로써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두 사람은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에이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면서 영화가 시작하고 마지막에 다시 내레이션이 나온다. 근데 내레이션이 너무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하고 있어서 에이다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어긋남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씩 날 불편하게 했다.
딸 아이가 구멍을 통해 엄마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지만 전혀 놀라는 표정도 없이 무심해 하는 상황이라든가, 그러면서 나중엔 엄마가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걸 말리는 장면, 이를 목격하는 남편이란 설정은 인위적이고 억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하지 않고 남편에게 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주민 남자가 에이다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조금은 생뚱맞고 (온몸을 드러내고 자신과 같이 눕자고 청하는 장면), 에이다가 남편의 몸을 만지는 장면도 웬지 어색하다. 에이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럴 수 있는 건지?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상황이 가능할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들은 개연성의 문제였던 것 같다. 20년 전, 영화는 한 마디로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소재와 설정, 예술적 영상, 끔찍한 장면, 적라의 몸. 어쩌면 문명 세계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감성과 본능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영화의 장면을 통해 위로와 대체 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간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음악의 역할도 결정적이다)가 관객을 단숨에 흡입했고, 그렇게 난 영상속으로 빠져든 것 같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굴곡을 겪으면서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지금, 이 영화는 내게 여러 부분에서 억지스러워 보였다. 감독의 메시지가 충분히 전해지긴 해도 그렇다. 에이다라는 여성이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 세계를 예술적 영혼의 세계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다.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이번 주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를 봤다. 1993년에 만들어진 영화,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독일 뮌헨 영화제에 소개된 이 영화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면서 전율과 감동으로 가슴 떨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20년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영화가 어떻게 다가올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한 마디로 영화는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년 전 너무나 강렬하게 내 가슴을 흔들었던 영화였던만큼 장면 하나하나 기억에 남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작은 화면으로 보는 장면들은 크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물론 순간 순간 여전히 매혹적인 영상들도 있었다. 홀리 헌터의 표정 연기, 광활한 바다와 그 앞에 놓여진 피아노... 영혼을 일깨우는 낭만적 무한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했다.
6살 때부터 말을 잃은 에이다는 어린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온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으로만 신부를 알고 있다가 처음으로 에이다를 본 남편은 그녀의 몸이 작은 것에 실망한다. 영국인으로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원주민 땅을 사들이는 남편은 서구적 문명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가부장적, 상업적 마인드를 가진 그는 아내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해변에 남겨두고 온다.
피아노가 에이다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감지한 원주민 남자는 그녀를 위해 남편과 거래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피아노를 사들여 에이다가 자기 집에서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이다. 남편에게는 피아노 교습을 받겠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그렇게 에이다는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고 둘 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은 에이다의 검지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냄으로써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두 사람은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에이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면서 영화가 시작하고 마지막에 다시 내레이션이 나온다. 근데 내레이션이 너무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하고 있어서 에이다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어긋남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씩 날 불편하게 했다.
딸 아이가 구멍을 통해 엄마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지만 전혀 놀라는 표정도 없이 무심해 하는 상황이라든가, 그러면서 나중엔 엄마가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걸 말리는 장면, 이를 목격하는 남편이란 설정은 인위적이고 억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하지 않고 남편에게 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주민 남자가 에이다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조금은 생뚱맞고 (온몸을 드러내고 자신과 같이 눕자고 청하는 장면), 에이다가 남편의 몸을 만지는 장면도 웬지 어색하다. 에이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럴 수 있는 건지?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상황이 가능할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들은 개연성의 문제였던 것 같다. 20년 전, 영화는 한 마디로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소재와 설정, 예술적 영상, 끔찍한 장면, 적라의 몸. 어쩌면 문명 세계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감성과 본능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영화의 장면을 통해 위로와 대체 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간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음악의 역할도 결정적이다)가 관객을 단숨에 흡입했고, 그렇게 난 영상속으로 빠져든 것 같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굴곡을 겪으면서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지금, 이 영화는 내게 여러 부분에서 억지스러워 보였다. 감독의 메시지가 충분히 전해지긴 해도 그렇다. 에이다라는 여성이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 세계를 예술적 영혼의 세계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다.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작가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작가로 만들어지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을 읽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선언함으로써 성 차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페미니즘을 무장시켰다. 1934년에 출간된 <작가 수업>에서 저자 도러시아 브랜디는 작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집고 누구나 노력과 훈련을 통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들을 생각할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작가가 되는 비법이 있고 그 비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고. 그녀가 제시하는 비법은 글을 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그 이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초 체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일단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다름 아닌 글쓰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시간을 내서 글을 쓰라고 제안한다.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곧바로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상태에서 글을 써내려가고, 하루에 한 번 짧은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글을 쓰라고 한다. 이러한 글쓰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킨다. 그녀가 제안한 이 방법은 이 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작가 수업>을 “글쓰기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줄리아 캐머런은 자신의 책 <아티스트 웨이>(1992년 출간)에서 브랜디의 제안을 ‘모닝 페이지’ 기법으로 부활시켰다. ‘모닝 페이지’는 우리 속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도구이다.
매일매일 글쓰기 외에도 저자는 작가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아이 같은 감수성과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어른스러움과 분별력 갖기, 무의식과 의식 간의 균형 잡기, 영감을 주는 책과 친구 만들기, 자신의 취향과 장점 찾기, 단순하고 건강한 일상을 통해 글쓰기에 집중하기 등과 같이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뿐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방법들까지 제시한다. 잘 쓴 글을 읽고 기술을 모방하는 법, 단어 배분과 문장 호흡, 그리고 작가로서 책읽기의 구체적 방법 등이 그것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작가 되는 비법을 전수받고 그것을 실천하는 건 결국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몫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분’의 시간을 내는 건 쉽지 않다. 실천이 힘들고 변명이 앞선다면 우리는 진정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왜? 무엇 때문에 글을 쓰려하는가 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작가가 된다.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든 글을 쓰는 건 그러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결국 글을 쓰는 것이고,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작가가 된다. 물론 “글을 잘 쓴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작가는 일단 글을 쓰는 사람이고 평가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렇다면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로써의 글쓰기를 통해 우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혹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지고 싶은 욕구, 나와 내 주위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 그렇게 글쓰기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 삶이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글쓰기는 공유의 수단이 된다. 브랜디는 작가가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 모습 그대로 공통된 경험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 각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내는 삶을 다른 이들과의 공감을 통해 공유할 수 있다.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타인과 공유하는 글쓰기. 이 이유만으로도 ‘작가수업’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21세기 인간 파우스트 - 구원받지 못하는 고독한 초인?
알렉산더 소쿠로프 러시아 감독의 <파우스트>를 봤다. 최근에 영화를 좋아하는 모임이 형성되어 여럿이 함께 봤다. 이대 예술영화극장 모모에서 늦은 시각에 모였고 감상 후 카페에서 짧게나마 영화토크를 가졌다. 일단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말은 "예술 영화는 함께 봐야한다"는 거였다. 그렇다. 예술영화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미처 보지 못한 디테일과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에서 갈라진 시신의 배 속 장기가 그대로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약간은 쇼킹한 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화면에 익숙해졌다.
많은 지식을 소유한 파우스트,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연구하지만 정작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으로 충족되지 않는 영혼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그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회의한다. 영혼과 이상에 대한 회의는 무엇보다 현실의 각박함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는 파우스트는 결국 전당포를 찾아간다. 자신이 소유한 반지를 맡기고 약간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허기를 채울 수 있기를 원한다.
전당포 주인으로 등장하는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허기와 갈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마가레트를 소개한다. 빨래터에서 처음 마가레트를 보게 되는 파우스트는 이제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결국 혈서로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녀와의 하룻밤을 얻게 된다.
파우스트와 마가레트가 만나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마가레트의 오빠 장례식에 참석해 그녀의 손을 건드리며 처음으로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파우스트, 이에 응답하는 마가리트의 미세한 손 떨림, 오빠를 죽인 사람이 파우스트인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 온 마가레트와 파우스트가 욕망에 들떠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 (특히 이 장면은 롱테이크와 환하게 밝아지는 명암처리로 두 사람의 심리 상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가에 서 있는 마가리트를 파우스트가 뒤에서 다가가 안는 장면, 뒤로 돌아보는 마가리트의 행복에 겨운 얼굴과 이어서 물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장면은 영상미의 절정을 이룬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에서 이 장면들은 유일하게 설레고, 밝고, 행복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강렬한 대비만으로도 영화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파우스트>를 예술영화로 승화시킨다.
짧은 하룻밤의 욕정이 채워지고 나서 죽음의 혼령들이 마가레트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 곁을 떠난 파우스트의 방황은 계속된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이끌며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죽는 것이 더 편안한 영혼들과 만나고, 이들은 파우스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당기지만 메피스토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를 구해준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좁은 길'로 인도하지만 그들이 도달하는 곳에 구원은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돌로 메피스토를 쳐죽이고 황량한 풍경속으로 길을 떠나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과 그 안의 고독한 인간. 악마까지 죽일 수 있는 파우스트는 구원받지 못하는 오만하고 고독한 21세기의 초인인가?
감독은 20세기의 독재자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에 이어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독재자, 권력자의 초상을 그린 4부작을 완성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고(영화 속에서 가족에 대한 환멸이 종종 언급된다), 신이 없는 세상(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는 요한복음의 첫구절에 대해 의문을 품는 파우스트에게 최초에 '나'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그 외에도 호문쿨르스를 만들어낸 바그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신이 파우스트라고 소리친다), 신을 죽인 세상(신에 버금가는 인물인 메피스토마저 죽임을 당한다)에서 고독한 인간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인간관계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고독한 인간, 신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초인의 모습,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첫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에서 갈라진 시신의 배 속 장기가 그대로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약간은 쇼킹한 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화면에 익숙해졌다.
많은 지식을 소유한 파우스트,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연구하지만 정작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으로 충족되지 않는 영혼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그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회의한다. 영혼과 이상에 대한 회의는 무엇보다 현실의 각박함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는 파우스트는 결국 전당포를 찾아간다. 자신이 소유한 반지를 맡기고 약간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허기를 채울 수 있기를 원한다.
전당포 주인으로 등장하는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허기와 갈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마가레트를 소개한다. 빨래터에서 처음 마가레트를 보게 되는 파우스트는 이제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결국 혈서로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녀와의 하룻밤을 얻게 된다.
파우스트와 마가레트가 만나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마가레트의 오빠 장례식에 참석해 그녀의 손을 건드리며 처음으로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파우스트, 이에 응답하는 마가리트의 미세한 손 떨림, 오빠를 죽인 사람이 파우스트인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 온 마가레트와 파우스트가 욕망에 들떠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 (특히 이 장면은 롱테이크와 환하게 밝아지는 명암처리로 두 사람의 심리 상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가에 서 있는 마가리트를 파우스트가 뒤에서 다가가 안는 장면, 뒤로 돌아보는 마가리트의 행복에 겨운 얼굴과 이어서 물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장면은 영상미의 절정을 이룬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에서 이 장면들은 유일하게 설레고, 밝고, 행복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강렬한 대비만으로도 영화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파우스트>를 예술영화로 승화시킨다.
짧은 하룻밤의 욕정이 채워지고 나서 죽음의 혼령들이 마가레트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 곁을 떠난 파우스트의 방황은 계속된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이끌며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죽는 것이 더 편안한 영혼들과 만나고, 이들은 파우스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당기지만 메피스토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를 구해준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좁은 길'로 인도하지만 그들이 도달하는 곳에 구원은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돌로 메피스토를 쳐죽이고 황량한 풍경속으로 길을 떠나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과 그 안의 고독한 인간. 악마까지 죽일 수 있는 파우스트는 구원받지 못하는 오만하고 고독한 21세기의 초인인가?
감독은 20세기의 독재자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에 이어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독재자, 권력자의 초상을 그린 4부작을 완성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고(영화 속에서 가족에 대한 환멸이 종종 언급된다), 신이 없는 세상(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는 요한복음의 첫구절에 대해 의문을 품는 파우스트에게 최초에 '나'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그 외에도 호문쿨르스를 만들어낸 바그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신이 파우스트라고 소리친다), 신을 죽인 세상(신에 버금가는 인물인 메피스토마저 죽임을 당한다)에서 고독한 인간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인간관계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고독한 인간, 신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초인의 모습,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13년 1월 1일 화요일
2013년 새해를 맞으며
새해 첫 날도 벌써 다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블로그를 좀 더 열심히 쓰자고 결심해본다. 가능하면 매일 들러서 뭔가 흔적을 남겨야지 마음을 먹는다.
올해는 시를 좀 더 읽게 될 것 같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서 격주간 모일 때마다 시 한편씩을 외워 오기로 했다.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가슴>이란 시를 옮겨본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
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가슴'이란 말이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시를 읽다보니 이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기서 모든 가슴이 마음으로 대체될 순 없는 걸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마음은 가슴의 의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슴'이 좀 더 포괄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몸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보다 가슴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 머리를 통해서보다 가슴을 통해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해하는 것도 다 가슴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니 가슴으로 사는 삶이란 삶의 정수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2013년 새해엔 따뜻한 가슴, 뜨거운 가슴, 넓은 가슴으로 살 수 있기 바란다.
올해는 블로그를 좀 더 열심히 쓰자고 결심해본다. 가능하면 매일 들러서 뭔가 흔적을 남겨야지 마음을 먹는다.
올해는 시를 좀 더 읽게 될 것 같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서 격주간 모일 때마다 시 한편씩을 외워 오기로 했다.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가슴>이란 시를 옮겨본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
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가슴'이란 말이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시를 읽다보니 이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기서 모든 가슴이 마음으로 대체될 순 없는 걸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마음은 가슴의 의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슴'이 좀 더 포괄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몸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보다 가슴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 머리를 통해서보다 가슴을 통해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해하는 것도 다 가슴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니 가슴으로 사는 삶이란 삶의 정수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2013년 새해엔 따뜻한 가슴, 뜨거운 가슴, 넓은 가슴으로 살 수 있기 바란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190)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행복론에 관한 책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가끔 행복한 순간에 삶의 충일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의 행복을 음미하는 것과 행복을 목적으로 삼아 그것을 좇아 가는 건 다른 얘기다.
재일 교포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뒤집어 버린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결과일 뿐이라고. 삶이 던지는 물음에 응답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생의 물음에 방점을 찍는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과 슬픔, 지진과 쓰나미, 원전의 파괴로 인한 수 많은 죽음과 황폐화를 목격하면서 우리의 삶이 '비상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위기를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썼고, 그것이 바로 그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고민하는 힘. 속편>이라고 한다. 2008년에 번역 출간된 <고민하는 힘>의 속편으로 나온 책인데 한국어 제목으론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일본어 판에 없는 한국어 서문에서 저자가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쓴 걸 보고 출판사에서 제목을 <살아야 하는 이유>로 달았다고 한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 근대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오스트리아의 정신신경과 의사이자 유대인으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프랑클의 고민과 사유를 통해 21세기 현대의 삶을 조명한다. 근대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문제인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고, 이를 분석하고 가시화 하면서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아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도'이다. 저자는 인간의 가치가 '창조', '경험', 그리고 '태도'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태도'야 말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태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프랑클이 든 예를 인용한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176)
'태도'는 죽기 바로 전에도 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의 양식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는, 그래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쉽지 않지만 '거듭나기'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쩌면 행복한 삶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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