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영화 모임을 우연히 알게 되어 얼마전부터 옛날 영화들을 보고 있다. 격주로 열리는 모임인데 매번 참석은 못해도 한 번씩 시간 나는대로 가본다. 기대했던 것보다 영화 본 후 토론이 꽤 잘 이루어져서 계속 가게 되었다. (물론 아닐 때도 있다. 사람이 적게 모일 땐 그렇다).
이번 주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를 봤다. 1993년에 만들어진 영화,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독일 뮌헨 영화제에 소개된 이 영화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면서 전율과 감동으로 가슴 떨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20년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영화가 어떻게 다가올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한 마디로 영화는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년 전 너무나 강렬하게 내 가슴을 흔들었던 영화였던만큼 장면 하나하나 기억에 남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작은 화면으로 보는 장면들은 크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물론 순간 순간 여전히 매혹적인 영상들도 있었다. 홀리 헌터의 표정 연기, 광활한 바다와 그 앞에 놓여진 피아노... 영혼을 일깨우는 낭만적 무한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했다.
6살 때부터 말을 잃은 에이다는 어린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온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으로만 신부를 알고 있다가 처음으로 에이다를 본 남편은 그녀의 몸이 작은 것에 실망한다. 영국인으로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원주민 땅을 사들이는 남편은 서구적 문명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가부장적, 상업적 마인드를 가진 그는 아내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해변에 남겨두고 온다.
피아노가 에이다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감지한 원주민 남자는 그녀를 위해 남편과 거래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피아노를 사들여 에이다가 자기 집에서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이다. 남편에게는 피아노 교습을 받겠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그렇게 에이다는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고 둘 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은 에이다의 검지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냄으로써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두 사람은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에이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면서 영화가 시작하고 마지막에 다시 내레이션이 나온다. 근데 내레이션이 너무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하고 있어서 에이다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어긋남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씩 날 불편하게 했다.
딸 아이가 구멍을 통해 엄마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지만 전혀 놀라는 표정도 없이 무심해 하는 상황이라든가, 그러면서 나중엔 엄마가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걸 말리는 장면, 이를 목격하는 남편이란 설정은 인위적이고 억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하지 않고 남편에게 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주민 남자가 에이다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조금은 생뚱맞고 (온몸을 드러내고 자신과 같이 눕자고 청하는 장면), 에이다가 남편의 몸을 만지는 장면도 웬지 어색하다. 에이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럴 수 있는 건지?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상황이 가능할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들은 개연성의 문제였던 것 같다. 20년 전, 영화는 한 마디로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소재와 설정, 예술적 영상, 끔찍한 장면, 적라의 몸. 어쩌면 문명 세계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감성과 본능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영화의 장면을 통해 위로와 대체 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간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음악의 역할도 결정적이다)가 관객을 단숨에 흡입했고, 그렇게 난 영상속으로 빠져든 것 같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굴곡을 겪으면서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지금, 이 영화는 내게 여러 부분에서 억지스러워 보였다. 감독의 메시지가 충분히 전해지긴 해도 그렇다. 에이다라는 여성이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 세계를 예술적 영혼의 세계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다.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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