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작가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작가로 만들어지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을 읽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선언함으로써 성 차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페미니즘을 무장시켰다. 1934년에 출간된 <작가 수업>에서 저자 도러시아 브랜디는 작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집고 누구나 노력과 훈련을 통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들을 생각할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작가가 되는 비법이 있고 그 비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고. 그녀가 제시하는 비법은 글을 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그 이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초 체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일단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다름 아닌 글쓰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시간을 내서 글을 쓰라고 제안한다.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곧바로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상태에서 글을 써내려가고, 하루에 한 번 짧은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글을 쓰라고 한다. 이러한 글쓰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킨다. 그녀가 제안한 이 방법은 이 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작가 수업>을 “글쓰기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줄리아 캐머런은 자신의 책 <아티스트 웨이>(1992년 출간)에서 브랜디의 제안을 ‘모닝 페이지’ 기법으로 부활시켰다. ‘모닝 페이지’는 우리 속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도구이다.

매일매일 글쓰기 외에도 저자는 작가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아이 같은 감수성과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어른스러움과 분별력 갖기, 무의식과 의식 간의 균형 잡기, 영감을 주는 책과 친구 만들기, 자신의 취향과 장점 찾기, 단순하고 건강한 일상을 통해 글쓰기에 집중하기 등과 같이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뿐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방법들까지 제시한다. 잘 쓴 글을 읽고 기술을 모방하는 법, 단어 배분과 문장 호흡, 그리고 작가로서 책읽기의 구체적 방법 등이 그것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작가 되는 비법을 전수받고 그것을 실천하는 건 결국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몫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분’의 시간을 내는 건 쉽지 않다. 실천이 힘들고 변명이 앞선다면 우리는 진정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왜? 무엇 때문에 글을 쓰려하는가 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작가가 된다.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든 글을 쓰는 건 그러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결국 글을 쓰는 것이고,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작가가 된다. 물론 “글을 잘 쓴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작가는 일단 글을 쓰는 사람이고 평가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렇다면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로써의 글쓰기를 통해 우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혹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지고 싶은 욕구, 나와 내 주위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 그렇게 글쓰기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 삶이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글쓰기는 공유의 수단이 된다. 브랜디는 작가가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 모습 그대로 공통된 경험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 각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내는 삶을 다른 이들과의 공감을 통해 공유할 수 있다.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타인과 공유하는 글쓰기. 이 이유만으로도 ‘작가수업’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21세기 인간 파우스트 - 구원받지 못하는 고독한 초인?

알렉산더 소쿠로프 러시아 감독의 <파우스트>를 봤다. 최근에 영화를 좋아하는 모임이 형성되어 여럿이 함께 봤다. 이대 예술영화극장 모모에서 늦은 시각에 모였고 감상 후 카페에서 짧게나마 영화토크를 가졌다. 일단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말은 "예술 영화는 함께 봐야한다"는 거였다. 그렇다. 예술영화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미처 보지 못한 디테일과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에서 갈라진 시신의 배 속 장기가 그대로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약간은 쇼킹한 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화면에 익숙해졌다.

많은 지식을 소유한 파우스트,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연구하지만 정작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으로 충족되지 않는 영혼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그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회의한다. 영혼과 이상에 대한 회의는 무엇보다 현실의 각박함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는 파우스트는 결국 전당포를 찾아간다. 자신이 소유한 반지를 맡기고 약간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허기를 채울 수 있기를 원한다.

전당포 주인으로 등장하는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허기와 갈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마가레트를 소개한다. 빨래터에서 처음 마가레트를 보게 되는 파우스트는 이제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결국 혈서로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녀와의 하룻밤을 얻게 된다.

파우스트와 마가레트가 만나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마가레트의 오빠 장례식에 참석해 그녀의 손을 건드리며 처음으로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파우스트, 이에 응답하는 마가리트의 미세한 손 떨림, 오빠를 죽인 사람이 파우스트인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 온 마가레트와 파우스트가 욕망에 들떠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 (특히 이 장면은 롱테이크와 환하게 밝아지는 명암처리로 두 사람의 심리 상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가에 서 있는 마가리트를 파우스트가 뒤에서 다가가 안는 장면, 뒤로 돌아보는 마가리트의 행복에 겨운 얼굴과 이어서 물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장면은 영상미의 절정을 이룬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에서 이 장면들은 유일하게 설레고, 밝고, 행복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강렬한 대비만으로도 영화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파우스트>를 예술영화로 승화시킨다.

짧은 하룻밤의 욕정이 채워지고 나서 죽음의 혼령들이 마가레트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 곁을 떠난 파우스트의 방황은 계속된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이끌며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죽는 것이 더 편안한 영혼들과 만나고, 이들은 파우스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당기지만 메피스토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를 구해준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좁은 길'로 인도하지만 그들이 도달하는 곳에 구원은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돌로 메피스토를 쳐죽이고 황량한 풍경속으로 길을 떠나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과 그 안의 고독한 인간. 악마까지 죽일 수 있는 파우스트는 구원받지 못하는 오만하고 고독한 21세기의 초인인가?

감독은 20세기의 독재자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에 이어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독재자, 권력자의 초상을 그린 4부작을 완성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고(영화 속에서 가족에 대한 환멸이 종종 언급된다), 신이 없는 세상(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는 요한복음의 첫구절에 대해 의문을 품는 파우스트에게 최초에 '나'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그 외에도 호문쿨르스를 만들어낸 바그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신이 파우스트라고 소리친다), 신을 죽인 세상(신에 버금가는 인물인 메피스토마저 죽임을 당한다)에서 고독한 인간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인간관계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고독한 인간, 신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초인의 모습,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13년 1월 1일 화요일

2013년 새해를 맞으며

새해 첫 날도 벌써 다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블로그를 좀 더 열심히 쓰자고 결심해본다. 가능하면 매일 들러서 뭔가 흔적을 남겨야지 마음을 먹는다.

올해는 시를 좀 더 읽게 될 것 같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서 격주간 모일 때마다 시 한편씩을 외워 오기로 했다.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가슴>이란 시를 옮겨본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
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가슴'이란 말이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시를 읽다보니 이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기서 모든 가슴이 마음으로 대체될 순 없는 걸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마음은 가슴의 의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슴'이 좀 더 포괄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몸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보다 가슴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 머리를 통해서보다 가슴을 통해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해하는 것도 다 가슴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니 가슴으로 사는 삶이란 삶의 정수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2013년 새해엔 따뜻한 가슴, 뜨거운 가슴, 넓은 가슴으로 살 수 있기 바란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190)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행복론에 관한 책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가끔 행복한 순간에 삶의 충일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의 행복을 음미하는 것과 행복을 목적으로 삼아 그것을 좇아 가는 건 다른 얘기다.

재일 교포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뒤집어 버린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결과일 뿐이라고. 삶이 던지는 물음에 응답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생의 물음에 방점을 찍는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과 슬픔, 지진과 쓰나미, 원전의 파괴로 인한 수 많은 죽음과 황폐화를 목격하면서 우리의 삶이 '비상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위기를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썼고, 그것이 바로 그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고민하는 힘. 속편>이라고 한다. 2008년에 번역 출간된 <고민하는 힘>의 속편으로 나온 책인데 한국어 제목으론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일본어 판에 없는 한국어 서문에서 저자가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쓴 걸 보고 출판사에서 제목을 <살아야 하는 이유>로 달았다고 한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 근대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오스트리아의 정신신경과 의사이자 유대인으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프랑클의 고민과 사유를 통해 21세기 현대의 삶을 조명한다. 근대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문제인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고, 이를 분석하고 가시화 하면서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아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도'이다. 저자는 인간의 가치가 '창조', '경험', 그리고 '태도'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태도'야 말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태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프랑클이 든 예를 인용한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176)

'태도'는 죽기 바로 전에도 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의 양식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는, 그래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쉽지 않지만 '거듭나기'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쩌면 행복한 삶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진리와 방법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1900-2002)의 <진리와 방법>(독일어 제목 Wahrheit und Methode 문학동네 출판)이 국내 첫 완역되었다고 한다.(한겨레 신문 11월 7일자)

20세기 서구 지성사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을 15년 동안 다섯 명의 번역자가 작업하여 이제 번역본을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에 1부가 이미 나왔고 이제 12년이 흐르고 2권이 나온 것이다. 1부는 이번에 개정판으로 보완되어 다시 나왔다고 한다.

가다머는 하이데거(1889-1976)의 제자로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자 '철학적 해석학'(philosophische Hermeneutik)의 창시자로 꼽힌다.  12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60살이 되어 펴낸 <진리와 방법>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천착한다. 그는 플라톤에서 시작해 딜타이에 이르는 서구 근대 학문의 역사와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그의 비판과 성찰은 철학뿐 아니라 미학, 문학, 역사학, 신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다머에게 진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인간 경험의 역사성으로부터 나오는 이해의 산물이다. 때문에 가다머의 해석학은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그는 역사적 문헌, 사건과 현재의 해석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지점에 주목했고, 이를 '영향사'라고 일컬었다. 역사적 전통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선입견이 이해의 기초적인 조건이 되지만, 현재의 해석자 스스로도 역사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펼쳐지는 부단한 상호작용이 이해를 확장해간다고 본 것이다. 전통의 전승과 전통과 현재의 소통을 매개하는 '언어'는 가다머에게 특히 중요한 탐구 대상이었다."

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이 책의 일부를 원서로 읽은 기억이 있다. 문학에서도 필독서로 추천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점이 결여된 상태에서 이해가 쉽지 않았었다. 숲에 들어가 나무만 바라보고 숲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책을 다시 훑어라도 보고 싶다. 그때 내가 무엇을 이해했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면서.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걷기 예찬

도보여행의 개척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제주도 올레길을 찾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2. 11. 3-4일자 기사)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초대되어 한국을 방문한 그의 나이는 두 달 후면 75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걷기'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역시 걷기를 좋아하고 제주 올레길도 이미 2코스 걸었다. 시간만 허락하면 동네길 걷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울 도심 걷기, 산길 걷기, 그리고 언젠가는 한비야 씨처럼 한국의 곳곳을 한바퀴 걸어 보고 싶은 희망도 갖고 있다.

올리비에 씨가 처음 걷기를 시작한 건 은퇴 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서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있던 그는 걷기를 시작했다. 산티에고를 걷고, 실크로드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걷고 있다. 다음 계획은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6개월을 걸을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감동적인 것은 그가 '쇠이유(Seuil 문턱)'라는 협회를 만들어 비행소년들의 재활을 돕는다는 사실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온 아이들을 데리고 3개월 동안 2000km를 걷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3개월 동안 2000km를 걷는다. 하루에 보통 25km 정도 걷는다. 두 달 정도는 몹시 추운 날씨이거나 눈 속에서 걷는다. 첫 달 몇 주는 등이 아프거나 발이 아프다며 저항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걷기에 즐거움을 느낀다. 끝까지 걷고 나면 아이들은 늘 숙이고 다니던 고개를 똑바로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 해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기 존엄성을 회복한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도 그들이 문턱을 넘는 데 힘을 실어 준다."

이 말을 들으며 마음이 찡해졌다. 공부에 치여, 성적에 밀려 자존감이 없는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이 머리를 스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긴 걷기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걷기를 통해 마음과 몸이 치유되고, 온전히 자기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걷기를 통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올리비에 씨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한국 고전 번역

한류가 대중 문화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켰다면 이제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세계에 소개하고 공유할 때가 되었다. 한국의 전통 사상과 역사를 소개하는 지난한 작업의 선두에 서 있는 최병헌 교수는 2003년 임진왜란의 원인과 국난 극복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한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을 번역했고 (The Book of Corrections), 2010년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출판했다 (영문제목은 Admonitions on Governing the People: Manual for All Administrators). 이 책들은 미국 대학의 동양학부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교수는 현재 <태조실록>을 번역 중이라고 한다.(조선일보 11월 3-4일자)  그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세계에 소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1차적으로 <태조실록>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자(漢字)를 하나 하나 영역하는 경우 곡괭이로 땅속 깊이 박힌 나무뿌리를 캐는 것 같고, 한 줄 전체를 번역하면 소로 밭 한 이랑을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요. 번역이 완성되면 어떤 씨앗을 심어도 삭을 틔울 것 같은 옥토로 변하니, 이 기쁨을 무엇에 견줄 수 있겠어요?"

최교수는 번역의 지난한 과정과 그 결과로서 얻게되는 기쁨을 밭을 가는 농부의 작업에 비유한다. 한영번역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충분히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고전 번역은 그 어려움이 몇 배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교수는 사실 영문학자이다. 하지만 시인이기도 한 그는 한국문학에서부터 출발했고 영문학을 공부한 후 이제 한국의 문화를 영문으로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고전을 번역할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외국어 교육의 허점을 꼬집는다.

"학자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학문을 해야 합니다. 영문학자라고 해서 서양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벌집 구멍 속'에 갇혀서 학문하거나 전문가연해서는 안 됩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고 그 뿌리 없음과 공허함에 회의적이 되어 다른 길을 밟아온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다. 애초부터 학문하는 목적을 설정하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목적'을 안다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이끌어주는 '깨인' 멘토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하지만 그래도 공부해서 버릴 건 없었던 것 같다.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 역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올해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고전은 우리 한국인이 먼저 읽어내야 할 과제다. 적어도 나에게 이 과제는 즐거운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