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학 시절 남자 친구에게 박명의 시간은 너무 외롭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타지에서의 삶이 그런 느낌을 갖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병주의 단편 '쥘부채'를 읽다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걸 보고 박명의 시간에 대한 내 느낌을 새롭게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박명의 시간이 주위를 에워쌌다. 전등이 꽃피기 시작했다. 유 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은 지혜의 시간이라고 했다. 어둠을 비추는 전등이 이 시간에만은 꽃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 시간은 또 노인의 주름살을 밉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초로의 잔주름을 뵈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청년의 미숙함이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며 승자의 뽐냄도 패자의 억울함도 노출되지 않는 시간이며 미녀의 미도 추녀의 추도 발언권을 잃는 시간이며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지혜의 시간",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말은 아마도 우리 인생사가 밝음과 어둠이 서로 얽힌, 그래서극명한 답이 없이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편의 내용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연히 쥘부채를 손에 넣은 주인공이 쥘부채를 만든 여성 수감자의 사랑을, 그녀가 죽고 나서 엮어주게 된다는 신비로운 우여곡절이 이 단편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박명의 시간을 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 어두워지긴 했어도 여전히 무언가를 볼 수 있고, 하지만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어쩌면 견디기 어려운 시간, 약간은 폐쇄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느낌을 가졌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순간을 잘 견뎌 냄으로써 지혜를 얻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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