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7일 목요일

가을빛 아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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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에서 풍속화 대전이 열렸다. 구청에서 개최한 조선미술사 강의에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인 백인산 씨가 한국 미술의 여러 면모를 인상깊게 들려주어서, 이번 가을 전시회에 꼭 가보기로 마음먹었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 개장 시간 2분 지나 도착했는데 이미 줄이 길게 서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천천히 이동하면서 미술관 정원 안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마음을 활짝 널어 말렸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옛 시간이 멈춘 이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입장객 수를 조절하면서 몇 명씩 나눠서 들여보내도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층에서 시작해 일층으로 내려오는 순서에 따라 계단을 올랐다. 대리석 계단과 오래된 건물의 아치를 느끼면서 전시장에 들어섰다. 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크고 작은 진품의 풍속화들이 몇 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시간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벅찼다.

이제 나이를 먹을수록 옛 것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삶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묻게 된다.

자신을 그려 넣은 김홍도의 그림들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인간에 대한 통찰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다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접했다.
작가는 인간이란 선인, 악인으로 구분될 수 없고,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등,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인간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서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온갖 요소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 어느 경우 그중의 하나가 돌출하면 똑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에 따라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민음사, 342쪽)

인간의 정체성이 아주 복합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정체성이란 한 인간의 다중 역할과 성격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적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이들에게 다정한 엄마이다가도 한번씩 버럭 화를 낼 때 '화내는 성질'이 돌출되는데, 톨스토이의 이 말은 그게 보통이라는 위안을 준다.

2011년 10월 15일 토요일

주도적으로 행복하게 느끼기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 외적인 동기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조용한 북카페에 앉아 책을 보다 얼굴을 들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안개가 자욱이 가라앉은 호수가를 걸으며, 맛있는 음식 한 점을 입안에 넣고... 이런 순간, 또는 잠깐 동안의 시간에 행복감을 맛본다.

주도적 삶을 사는 것이 첫 번째 습관이라고 말하는 스티븐 코비 Stephen R. Covey는 자신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원제: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역시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따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주도적인 일은 행복하게 느끼는 것, 즉 진심으로 웃는 것이다. 행복은 불행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도적인 선택이다" (129쪽)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렇구나 하는 깨우침이 있었다. 그래, 우린 언제나 행복한 순간이 내게 찾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행복이 찾아올 거라 믿으며 지금의 고통을 감내하기도 한다. 지금 이 고통의 순간을, 힘든 시간을 견디면 행복이 보상해 줄거야 하고.

하지만 행복을 느끼는 것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니 갑자기 행복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리는 듯 하다.

사춘기 딸 아이가 가끔 웃겨줄 때 의식적으로 더 웃어본 경험이 있다. 나의 진지함에서 벗어나, 아이와 더 잘 호흡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의식적 반응이 날 더 즐겁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이제 좀 더 의식적으로 행복하게 느끼기를 주도해 봐야겠다.

헌데 불행도 주도적인 것이라는 말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다.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박명(薄明)의 시간

독일 유학 시절 남자 친구에게 박명의 시간은 너무 외롭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타지에서의 삶이 그런 느낌을 갖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병주의 단편 '쥘부채'를 읽다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걸 보고 박명의 시간에 대한 내 느낌을 새롭게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박명의 시간이 주위를 에워쌌다. 전등이 꽃피기 시작했다. 유 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은 지혜의 시간이라고 했다. 어둠을 비추는 전등이 이 시간에만은 꽃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 시간은 또 노인의 주름살을 밉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초로의 잔주름을 뵈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청년의 미숙함이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며 승자의 뽐냄도 패자의 억울함도 노출되지 않는 시간이며 미녀의 미도 추녀의 추도 발언권을 잃는 시간이며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지혜의 시간",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말은 아마도 우리 인생사가 밝음과 어둠이 서로 얽힌, 그래서극명한 답이 없이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편의 내용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연히 쥘부채를 손에 넣은 주인공이 쥘부채를 만든 여성 수감자의 사랑을, 그녀가 죽고 나서 엮어주게 된다는 신비로운 우여곡절이 이 단편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박명의 시간을 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 어두워지긴 했어도 여전히 무언가를 볼 수 있고, 하지만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어쩌면 견디기 어려운 시간, 약간은 폐쇄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느낌을 가졌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순간을 잘 견뎌 냄으로써 지혜를 얻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