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현대 지성 중 한 명인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의 강의록 시리즈가 국내에 번역되어 첫 선을 보였다. <부정변증법 강의>(세창 출판사, 이순예 역)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다른 강의록이 앞으로 소개될 것이라고 한다.(한겨레 2012.8.29)
어렵기로 이름난 아도르노의 책을 조금 맛보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사상은 철학, 윤리학, 문화, 자본, 미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고 독특한 사상체계와 비유, 은유적 표현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아도르노 사상의 핵심은 '동일성'에 대한 사유라고 한다. 이성을 앞세운 서구의 합리주의는 개념과 사안(Sache, 대상이 되는 사태)을 강제로 일치시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켜 왓다. 이런한 '동일성' 사고는 대상을 지배하는 착취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다. 아도르는 개념과 사안이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래서 그는 "사안은 개념보다 크다", "전체는 비진리다"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안은 개념을 통하지 않고선 인식될 수 없다'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동일성 사유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한 것이 '부정변증법'이다.
쉬운 예로 "이순예는 여성이다"는 동일성 사유에 근거한 서술이라면 "이순예는 남성이 아닌 인간이다"와 같은 부정적 진술이야말로 보다 객관적인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아도르노의 핵심적 사상은 사실 누구라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단순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어떤 대상이나 사안이 결코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포던의 시대에 와서야 이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물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성 사유의 틀은 완전히 깨지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판에서,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시민의 생각 속에...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이십억 광년의 고독
제목에 꽂혀서 나니카와 슌타로의 시선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샀다.
'이십억 광년'이란 수식어로 고독의 의미를 강렬하게 증폭시켜 놓아 아득하게 떨어질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이 느껴졌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인간의 고독을 전지구적 고독으로 묘사하고 우주 속의 고독으로 끌어올린다.
고독 속에 별들은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주는 점점 팽창해 가고 서로 간의 거리는, 고독은 더욱 커져간다.
마지막 줄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는 무슨 뜻인가?
그 어마어마한 고독을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나오는 생리적 반응으로서의 재채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 그 무력감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십억 광년'이란 수식어로 고독의 의미를 강렬하게 증폭시켜 놓아 아득하게 떨어질 것 같은 고독의 심연이 느껴졌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인간의 고독을 전지구적 고독으로 묘사하고 우주 속의 고독으로 끌어올린다.
고독 속에 별들은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주는 점점 팽창해 가고 서로 간의 거리는, 고독은 더욱 커져간다.
마지막 줄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는 무슨 뜻인가?
그 어마어마한 고독을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나오는 생리적 반응으로서의 재채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 그 무력감을 상징하는 것일까?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로렌스 더렐
로렌스 더렐(1910-1990)은 세계화와 다민족적 정체성의 시대에 삶의 수수께끼를 가장 먼저 탐구한 작가로 평가된다.(뉴스위크, 2012.8.29)
그의 걸작 <알렉산드리아 4중주>(The Alexandria Quartet)는 1957~1960년에 출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중간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 시리즈며 정치 스릴러다. 존 그리셤의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가 다시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평가된다.
한편으로는 인종, 종파, 언어가 한 공간에 채워졌지만 그 결과 극도로 분열된 세계에서 사랑과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많은 현실이 있는데" 어떻게 단 하나의 진실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의 관점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고 한 캐릭터 조차도 다중인격의 프리즘을 통해 관점은 사분오열된다.
데렐은 인도에서 3세대 앵글로-아이리시 식민지 주민으로 성장했고 이러한 개인적 성장 배경은 22세 때 "나는 인도인의 가슴과 영국인의 피부를 가졌다"라는 깨달음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일종의 심리적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영국 생활을 치통처럼 견디지 못해 떠돌아 다니며 자신을 '직업적 난민'으로 이해한 더렐은 영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실험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적어도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겪게될 심리적 방황과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소설이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이미 히트를 친 청소년 소설 <완득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전히 다문화 아이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다문화 공동체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무늬를 그려내는 작품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하는 경우 이민결혼자를 소재로 한 <라오 라오가 좋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주요한 이슈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앞으로 좀 더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그의 걸작 <알렉산드리아 4중주>(The Alexandria Quartet)는 1957~1960년에 출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중간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 시리즈며 정치 스릴러다. 존 그리셤의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가 다시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평가된다.
한편으로는 인종, 종파, 언어가 한 공간에 채워졌지만 그 결과 극도로 분열된 세계에서 사랑과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많은 현실이 있는데" 어떻게 단 하나의 진실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의 관점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고 한 캐릭터 조차도 다중인격의 프리즘을 통해 관점은 사분오열된다.
데렐은 인도에서 3세대 앵글로-아이리시 식민지 주민으로 성장했고 이러한 개인적 성장 배경은 22세 때 "나는 인도인의 가슴과 영국인의 피부를 가졌다"라는 깨달음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일종의 심리적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영국 생활을 치통처럼 견디지 못해 떠돌아 다니며 자신을 '직업적 난민'으로 이해한 더렐은 영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실험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적어도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겪게될 심리적 방황과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소설이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이미 히트를 친 청소년 소설 <완득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전히 다문화 아이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다문화 공동체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무늬를 그려내는 작품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하는 경우 이민결혼자를 소재로 한 <라오 라오가 좋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주요한 이슈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앞으로 좀 더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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