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1일 금요일

'차등적 사랑'

올해 책읽기 모임에서 한국의 고전을 읽기로 해서 조선시대 사상가들의 글을 조금씩 읽고 있다. 아직은 입문 단계여서 쉽게 해석하거나 풀어 쓴 책들을 선정해서 읽고 있다.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정약용 등등이 목록에 올라와 있다. 그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고 있던 중에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글을 읽었다.

한국의 지성인들과 글쓰기를 주제로 대담한 내용이나 이들의 글을 모아 엮은 <글쓰기의 최소원칙>((경희대학교출판국 2008)에서 배병삼 교수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무엇보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그런 후에 구절, 문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로서 그는  <맹자>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의미가 각각 다른 단어로 쓰여 있고, 따라서 그 사랑의 의미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등적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맹자의 글을 인용해보자.

"군자란 사물(物)에 대해선 애(愛)하되 인(仁)하지 않으며, 백성(民)에 대해선 인(仁)하되 친(親)하지 않는다. 어버이(親)에 대해선 친(親)하며, 백성에 대해선 인(仁)하며, 사물에겐 애(愛)하느니라."

여기서 인, 애, 친, 은 모두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맹자는 이 단어를 각기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부모에게 쓰는 사랑인 친(親)은 가장 고급하고, 백성들에게 쓰는 사랑인 인(仁)은 그 다음이고, 사물에 대해 베푸는 사랑인 애(愛)는 가장 하천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를 그냥 '사랑'으로 번역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없고 유교 사상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 사랑, 사랑을 등급으로 나누는 철학적 특성을 간과하게 된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사랑은 아끼는 정도이고 백성에 대한 사랑인 인은 관계를 맺는, 소통하는 사랑이어서 일방적이지 않고,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전폭적인 사랑, 절대적 사랑이라고 본다.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고전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으니 원서를 보면서 한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현대식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그 의미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모든 번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고전을 공부할수록 한문을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고 있는데 이제 그 절실함이 더 커졌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주마간산

<중학생을 위한 고사성어 만점공부법>(박기복 지음)이란 책의 광고를 보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주문했다. 아빠, 엄마, 딸, 아들 네명이 대화를 나누며 고사성어를 들먹이는 식으로 꾸며진 책이다. 여러 가지 주제(가족, 행복,  공부, 관계 등등) 아래 대화 상황을 설정해 놓고 얘기가 전개되고 대화 속에 적절한 고사성어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책을 구입해 함께 잠자리에서 매일 한 챕터씩 읽고 있다.

한 번은 '바쁘다고 느껴질 때'라는 소제목 대화문을 읽는데 '주마간산'(走馬看山)'이란 말이 나왔다. '달리는 말을 타고 산천을 구경한다'는 말로,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대충대충 보고 지나간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란 걸 대충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이 말의 뜻을 재음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게 지내느라 현재를 놓치고 산다. 꿈과 목표를 좇아서, 혹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향해 좇아가느라, 진작 살아내야 할 지금, 현재는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현재는 미래에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천히 속도를 늦춰 주위를 돌아보면 세상은 볼거리도 흥미거리도 많다. 소소한 것들, 일상의 행위들,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구름이 예쁘게 피어난 하늘, 새롭게 움트는 싹과 피어나는 꽃,  아이들의 순진한 얼굴과 맑은 미소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쁨 속에서 생의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바쁜 삶이란 게 현대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는데,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바쁘게 산 모양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달렸겠지만.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달리긴 쉽지 않다. 그러니 자동차에서 내려 자전거로 옮겨 타자. 아니면 걷기도 괜찮다. 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 씨가 쓴 책  제목 <천천히가 좋아요>처럼 천천히 사는 것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지혜다.

2012년 5월 8일 화요일

수필의 발견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수필반에 등록을 하고 이제 몇 주가 지났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렇게 강의를 듣게 된 건 처음이다.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모여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다. 아직 글을 써 가져와 읽고 서로의 평을 듣는 시간은 갖지 못했다. 하지만 수업을 듣다보면 이런 저런 글감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일상에서 벗어나 이런 여유를 부린다는 게 즐겁다.

문학을 좋아해서 공부도 했었지만 수필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특별히 쏟은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이제 수필반에 들어와 글쓰기도 해야 할 판이 되니 수필을 어떻게 쓰나, 궁금해진다. 수업 중에 이미 몇 편의 글을 읽긴 했다. 피천득의  <수필>, 도창희의 <설산유정>, 그리고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 그것이다.

수필의 대가인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설명한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로부터 시작해 "수필은 독백이다."까지 다양하게 정의를 내린다. 수필은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는 말도 하고, 수필은 "온아 우미"하다고도 한다. 수필은 또한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라고도 한다.

수필은 어떻게 보면 쉽게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듯 하지만 그것이 수필 문학이 되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 장르다. 이전에는 수필을 좀 얕잡아본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이나 시, 희곡에 비해 수필은 한 단계 낮은 문학이라는 말도 안 되는(지금 와서 깨달았다)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수필의 세계 역시 다른 문학 장르만큼 아름답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염정임의 <우리집 책들의 결혼>을 읽으면서 고급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을 발견한다. 유려하고 감각적으로 쓰인 짧은 글 속에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체는 큰 문학적 감동을 준다. 작가의 다른 책 두 권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놓았다.
한동안 수필 애독자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