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7일 수요일

갈라파고스 거북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인 핀타섬에서만 서식해온 코끼리거북 '외로운 조지'가 24일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1835년 26세의 젊은 청년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왔고 그곳에 5주 동안 머물면서 연구를 위한 표본을 채집했다. 다윈은 이를 토대로 자신의 진화론을 탄생시킨다. 핀치새가 사는 섬마다 부리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모든 생물이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거나 도태한다는 '적자생존'의 이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거북이 역시 사는 섬에 따라 특징이 조금씩 달라 11가지 아종(亞種)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 중 한 종이 코끼리거북이다. '외로운 조지'는 자신이 속한 아종의 마지막 한 마리였고 백살을 조금 넘겼다. '외로운 조지'는 종족 보존에 의욕을 보이지 않아 짝짓기를 해도 무정란만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외롭게 홀로 남아 살다가 죽었다.

'갈라파고스'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거북이'를 뜻한다고 한다. 이 이름은 1535년에 파나마 주교였던 토마스 드 베를랑가가 풍랑에 밀려 이 섬에 들어왔고, 온 섬을 뒤덮은 거북이를 기억하고 나중에 지도 제작에 이 섬을 그려넣을 때 이름을 '갈라파고스'로 붙였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에콰도르 서쪽 972km 태평양 상에 19개의 화산섬과 암초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외진 곳이어서 외부 사람들이 찾아가기 힘들었고 그 덕분에 희귀한 생물 종이 오랫동안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화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에 와서 선원과 어민들의 포획으로 수십만 마리에 달하던 거북이도 지금은 2만 마리 남짓 남아 있다고 한다.

'외로운 조지'가 종족 보존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생물이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한다는 진화론에 이제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 생존을 거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이론이 덧붙여져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환경이 더 이상 살 만하지 않을 때, 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공부지옥에서 시달리다 더 이상 적응 못하고 삶을 던져버리는 아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2012년 6월 9일 토요일

인생의 밭

청소년 시기를 거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이 벅차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질풍 노도의 파도에 나 역시 파도타기를 하는 느낌이 들고, 걱정, 불안, 절망, 두려움이 교차되는 순간들이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느낌있게 다가오고, 자식 없이 자유로운 친구들을 보면 잠시 부럽기도 하다.

그러다가 서영은의 짧은 글 '결실'을 읽었다. 그녀의 책 <일곱 빛깔의 위안>에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인생의 밭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결실에 대해 얘기한다.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어 땀과 노력의 결실인 열매와 곡식을 얻게 되는 농사와 달리 인생의 밭에서 얻는 결실은 책임감이라고 한다. 인생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인생 농사는 관계를 심고 거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관계의 결실은 책임감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결혼을 한다는 건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의 씨를 뿌리는 것이고 자식을 갖는 것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씨의 결실은 책임감으로 완성된다는 것.
파트너를 끝까지 책임지고, 부모를 책임지고, 자식을 책임지는 일, 그것이 '관계'의 결실이고 인생 수확기의 결실이 된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령 시부모나 남편이 중병이 들었을 때, 며느리나 아내의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들은 그 상황을 전적으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 힘겨움에도 그 상황을 온전히 떠맡는 것이 관계의 거둠이고 결실이다. 여기에는 농부들처럼 지금까지 땀과 노력을 바친 만큼의 결과를 앉아서 따먹는 식의 손에 쥐는 열매가 없다. 그러나 그 거둠이 책임감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자기를 태워 빛을 발하는 것이고,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더 많은 알곡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우리가 결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즉 직업적 성공이나 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보상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고 또 다시 '관계'를 맺고 책임을 다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부모는 먼저 난 사람들로서 나중에 난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고, 나중에 난 사람은 또 다시 그 이후에 오는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인생을 공동체 전체의 연속성 속에서 바라본다.

"나의 죽음이나 변용은 전체성 속에서 결실로 거두어지게 된다. 먼저 난 사람들이 있기에 나중 난 사람이었던 우리가 어느새 먼저 난 사람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와 있다. 위로도 아래로도 책임질 관계의 중심부에 자리한다. 그 책임을 얼마나 성심껏 치러 내느냐에 따른 열매는 나중 오는 사람들 속에서 거둠의 넓이나 깊이로서 감지될 것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걱정보다 내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다. 자식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책임 질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가 맡은 책임이 아닐까 싶다. 그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자신과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길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잠시 위안을 얻는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고통과 힘겨움이 따르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는 힘듬이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큰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