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소쿠로프 러시아 감독의 <파우스트>를 봤다. 최근에 영화를 좋아하는 모임이 형성되어 여럿이 함께 봤다. 이대 예술영화극장 모모에서 늦은 시각에 모였고 감상 후 카페에서 짧게나마 영화토크를 가졌다. 일단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말은 "예술 영화는 함께 봐야한다"는 거였다. 그렇다. 예술영화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미처 보지 못한 디테일과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에서 갈라진 시신의 배 속 장기가 그대로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약간은 쇼킹한 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화면에 익숙해졌다.
많은 지식을 소유한 파우스트,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연구하지만 정작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으로 충족되지 않는 영혼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그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회의한다. 영혼과 이상에 대한 회의는 무엇보다 현실의 각박함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는 파우스트는 결국 전당포를 찾아간다. 자신이 소유한 반지를 맡기고 약간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허기를 채울 수 있기를 원한다.
전당포 주인으로 등장하는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허기와 갈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마가레트를 소개한다. 빨래터에서 처음 마가레트를 보게 되는 파우스트는 이제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결국 혈서로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녀와의 하룻밤을 얻게 된다.
파우스트와 마가레트가 만나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마가레트의 오빠 장례식에 참석해 그녀의 손을 건드리며 처음으로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파우스트, 이에 응답하는 마가리트의 미세한 손 떨림, 오빠를 죽인 사람이 파우스트인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 온 마가레트와 파우스트가 욕망에 들떠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 (특히 이 장면은 롱테이크와 환하게 밝아지는 명암처리로 두 사람의 심리 상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가에 서 있는 마가리트를 파우스트가 뒤에서 다가가 안는 장면, 뒤로 돌아보는 마가리트의 행복에 겨운 얼굴과 이어서 물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장면은 영상미의 절정을 이룬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에서 이 장면들은 유일하게 설레고, 밝고, 행복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강렬한 대비만으로도 영화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파우스트>를 예술영화로 승화시킨다.
짧은 하룻밤의 욕정이 채워지고 나서 죽음의 혼령들이 마가레트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 곁을 떠난 파우스트의 방황은 계속된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이끌며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죽는 것이 더 편안한 영혼들과 만나고, 이들은 파우스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당기지만 메피스토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를 구해준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좁은 길'로 인도하지만 그들이 도달하는 곳에 구원은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돌로 메피스토를 쳐죽이고 황량한 풍경속으로 길을 떠나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과 그 안의 고독한 인간. 악마까지 죽일 수 있는 파우스트는 구원받지 못하는 오만하고 고독한 21세기의 초인인가?
감독은 20세기의 독재자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에 이어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독재자, 권력자의 초상을 그린 4부작을 완성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고(영화 속에서 가족에 대한 환멸이 종종 언급된다), 신이 없는 세상(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는 요한복음의 첫구절에 대해 의문을 품는 파우스트에게 최초에 '나'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그 외에도 호문쿨르스를 만들어낸 바그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신이 파우스트라고 소리친다), 신을 죽인 세상(신에 버금가는 인물인 메피스토마저 죽임을 당한다)에서 고독한 인간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인간관계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고독한 인간, 신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초인의 모습,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2013년 1월 1일 화요일
2013년 새해를 맞으며
새해 첫 날도 벌써 다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블로그를 좀 더 열심히 쓰자고 결심해본다. 가능하면 매일 들러서 뭔가 흔적을 남겨야지 마음을 먹는다.
올해는 시를 좀 더 읽게 될 것 같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서 격주간 모일 때마다 시 한편씩을 외워 오기로 했다.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가슴>이란 시를 옮겨본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
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가슴'이란 말이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시를 읽다보니 이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기서 모든 가슴이 마음으로 대체될 순 없는 걸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마음은 가슴의 의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슴'이 좀 더 포괄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몸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보다 가슴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 머리를 통해서보다 가슴을 통해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해하는 것도 다 가슴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니 가슴으로 사는 삶이란 삶의 정수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2013년 새해엔 따뜻한 가슴, 뜨거운 가슴, 넓은 가슴으로 살 수 있기 바란다.
올해는 블로그를 좀 더 열심히 쓰자고 결심해본다. 가능하면 매일 들러서 뭔가 흔적을 남겨야지 마음을 먹는다.
올해는 시를 좀 더 읽게 될 것 같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서 격주간 모일 때마다 시 한편씩을 외워 오기로 했다.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가슴>이란 시를 옮겨본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
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가슴'이란 말이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시를 읽다보니 이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가슴'과 '마음'의 차이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기서 모든 가슴이 마음으로 대체될 순 없는 걸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마음은 가슴의 의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슴'이 좀 더 포괄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몸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보다 가슴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 머리를 통해서보다 가슴을 통해서다.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해하는 것도 다 가슴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니 가슴으로 사는 삶이란 삶의 정수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2013년 새해엔 따뜻한 가슴, 뜨거운 가슴, 넓은 가슴으로 살 수 있기 바란다.
피드 구독하기:
덧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