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가 한겨레 신문에 <인권 오디세이>라는 오피니언 칼럼 시리즈 첫 글에서 '인권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썼다.(한겨레 5월29일자)
서양에서 '휴먼 라이츠(human rights)'라는 말이 2차 세계대전 후 1948년 세계인권선언으로 정착되기 전까지 '인권'은 다양한 표현으로 변화되어왔다. 남성이 인간을 대표하기도 하고 '권리'의 의미도 역사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객관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어떤 상태'라는 의미가 전해져 오다가 근대에 와서 '인간이 마땅히 행사하고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라는 주관적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서구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한자어로 번역되다가 일본에서는 1885년 처음으로 '권리'라는 말이 사전에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권리'라는 번역어가 1880년대 후반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여성, 유색인종, 장애인, 이주민 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 그것이 인권과 부합한다고 착각했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인권'이란 말보다 '의권'(義權)이란 말을 제안한다. '정당하고 옳다'라는 의미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란 뜻이 잘 배합된 말로서 이 말을 제안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의도가 수긍이 가지만, - 게다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권리까지 고려한다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의권'으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다양한 그룹의 인간들이 그 차이 때문에 차별받는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권'의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이 '의권'보다는 더 구속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인권운동이 여타 인도적 개념과 구분되는 핵심적 이유가 '권리의 객관적 규범과 주관적 요구자격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즉 '권리'에 내포된 두 가지 측면이 여기서 발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하나는 '정당하고 옳은' 대상이나 행위는 계속 발굴 될 수 있고(아마도 의식의 확장으로), 그리고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 입법화와 제도화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겨나고 있다. 개인적인 이유로 사회의 소수자가 당하는 불이익과 편견이 얼마나 근거 없는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 다수들이 갖는 잘못된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인권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고 김두식 교수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 최근 인권운동사랑방이 엮은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도 추천할 만하다. 아니 추천 정도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씩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2013년 5월 4일 토요일
만화를 다시 보다
한겨레 토요일 신문 커버스토리로 만화가 허영만 씨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만화는 공짜'라는 사회적 인식과 싸우기 위해 허화백이 카카오스토리에 식객을 유료로 연재하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인터뷰 기사와 더불어 실린 다른 기사에서는 한국의 만화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해방 후 대본소(貸本所)라 불린 만화방을 통해 만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만화 전문지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1980년대에 르네상스 시기를 맞은 이야기, 1990년대에 도서대여점의 급증과 일본 만화의 직수입으로 만화가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웹툰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신인만화가들이 데뷔할 수 있는 문턱이 낮아진 것 등 흥미로웠다.재밌는 건 만화가의 위상이 지금은 훨씬 좋아졌지만 군사정권 때는 만화책이 '화형식'을 당하고, 직업이 만화가라는 게 밝혀지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초등학교 시절 만화방에서 열심히 만화를 보고 집에까지 빌려가서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오빠들과 학교도 빼먹고 만화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엄마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그 시대에 초등3-4학년들은 75% 정도가 만화방을 찾았다는 통계도 있다고 하니 참 많은 사람들이 만화와 함께 성장했구나 싶다.
<식객>은 아마 우리 아이들에게 어린시절의 추억을 담은 만화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에 12권 정도까지 구입해서 온 가족이 돌려 읽었었다. 애들이 초등, 중등 때였다. 음식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감동적인 서사가 함께 하는 책을 읽고 애들은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체험하고 마음을 살찌우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 시대 왕이 먹었다는 우유를 넣어 끓인 타락죽도 함께 만들어 먹어 보기도 했다.
최근에 처음으로 만화가를 직접 만나는 기회도 있었다. <정가네 소사>를 쓴 만화가 정용연 씨를 책모임의 한 회원이 개인적으로 알아서 만화를 읽고 저자를 초대했었다. 처음 책을 낸 작가와 나눈 얘기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만화를 그리는 일이 대단한 노동이란 사실이었다. 3권의 책으로 나온 작품을 만들면서 어깨가 빠지고 팔에 무리가 오는 등, 실로 창작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오롯이 육체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금방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만화책값이 비싸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부끄러웠다.
허영만 화백도 이번에 유료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만화 일생을 걸었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앞선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만화작가로 살아가고 싶어도 너무나 각박한 현실에서 제대로 된 창작품과 문화적 콘텐츠가 생성되기 어렵다고 한다. 꽤 성공했다고 하는 그조차 자신과 함께 일하는 문하생을 먹여 살리며 작업하자면 한 달에 몇 천만원이 필요하고, 벌어서 집에 가져갈 돈이 없다고 했다.
허영만 화백의 시도가 좀 더 큰 반향을 일으키고 문화계의 이슈가 되어 사람들이 만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길 바란다. 공짜 좋아하는 우리도 이젠 최소한의 댓가를 치르며 좋은 만화를 볼 수 있는 교양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화가들도 노동의 댓가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기사와 더불어 실린 다른 기사에서는 한국의 만화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해방 후 대본소(貸本所)라 불린 만화방을 통해 만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만화 전문지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1980년대에 르네상스 시기를 맞은 이야기, 1990년대에 도서대여점의 급증과 일본 만화의 직수입으로 만화가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웹툰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신인만화가들이 데뷔할 수 있는 문턱이 낮아진 것 등 흥미로웠다.재밌는 건 만화가의 위상이 지금은 훨씬 좋아졌지만 군사정권 때는 만화책이 '화형식'을 당하고, 직업이 만화가라는 게 밝혀지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초등학교 시절 만화방에서 열심히 만화를 보고 집에까지 빌려가서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오빠들과 학교도 빼먹고 만화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엄마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그 시대에 초등3-4학년들은 75% 정도가 만화방을 찾았다는 통계도 있다고 하니 참 많은 사람들이 만화와 함께 성장했구나 싶다.
<식객>은 아마 우리 아이들에게 어린시절의 추억을 담은 만화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에 12권 정도까지 구입해서 온 가족이 돌려 읽었었다. 애들이 초등, 중등 때였다. 음식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감동적인 서사가 함께 하는 책을 읽고 애들은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체험하고 마음을 살찌우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 시대 왕이 먹었다는 우유를 넣어 끓인 타락죽도 함께 만들어 먹어 보기도 했다.
최근에 처음으로 만화가를 직접 만나는 기회도 있었다. <정가네 소사>를 쓴 만화가 정용연 씨를 책모임의 한 회원이 개인적으로 알아서 만화를 읽고 저자를 초대했었다. 처음 책을 낸 작가와 나눈 얘기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만화를 그리는 일이 대단한 노동이란 사실이었다. 3권의 책으로 나온 작품을 만들면서 어깨가 빠지고 팔에 무리가 오는 등, 실로 창작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오롯이 육체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금방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만화책값이 비싸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부끄러웠다.
허영만 화백도 이번에 유료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만화 일생을 걸었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앞선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만화작가로 살아가고 싶어도 너무나 각박한 현실에서 제대로 된 창작품과 문화적 콘텐츠가 생성되기 어렵다고 한다. 꽤 성공했다고 하는 그조차 자신과 함께 일하는 문하생을 먹여 살리며 작업하자면 한 달에 몇 천만원이 필요하고, 벌어서 집에 가져갈 돈이 없다고 했다.
허영만 화백의 시도가 좀 더 큰 반향을 일으키고 문화계의 이슈가 되어 사람들이 만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길 바란다. 공짜 좋아하는 우리도 이젠 최소한의 댓가를 치르며 좋은 만화를 볼 수 있는 교양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화가들도 노동의 댓가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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